
태주는 곧 사태가 정리될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승연을 안심시켰다. 승연은 자신이 영등포구청으로 찾아가겠다고 했다. 몸이라도 다칠까 봐 걱정됐고, 수배 중인 태주가 잡힐까 염려됐다. 불길한 느낌을 떨쳐 버리려 승연은 태주가 보고 싶다고 둘러댔다. 그렇게라도 태주가 그곳에서 나오길 바랐다.
“승연아, 너까지 여기 올 필요 없어. 곧 해결될 거야, 나 들어가 봐야 하니 끊을게. 걱정하지마, 연락할게.”
전화기 너머로 뚜 하는 소리가 들렸다. 승연은 한동안 수화기를 놓지 못했다. 태주도 전화를 끊고 한참을 공중전화 부스에 머물렀다. 짧은 통화였지만 왠지 가장 긴 대화를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승연은 불안했다.
태주는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찾았다. 어머니의 고단하고 지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태주 귀를 어지럽혔다. 어머니, 별고 없으시지요. 어머니는 오랜만에 걸려 온 아들의 연락이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행여 아들의 구속이나 사망 소식일까 해서 수화기 집는 걸 망설였던 그녀다. 태주 목소리에 어머니는 안도했다.
“아이고 이보시게. 어젯밤 꿈자리가 안 좋아 걱정하던 참이네, 지금 자네 어딘가?”
태주는 방학이라 아르바이트하고 있다고 거짓말했다. 어머니는 속는 셈 치고 안도하는 척했다. 여보시게 연락이라도 자주 해 주게나, 어미 속 타 죽겠네. 어머니, 죄송해요, 건장 잘 챙기시고요. 태주는 자주 연락하겠다는 약속으로 어머니와의 통화를 짧게 마쳤다.
18일 자정이었다, 서울시장은 영등포구청에 공권력을 투입하겠다고 전화로 정식 통보했다. 구청에서 농성 중인 군중은 분노했다. 부정선거 의혹을 규명하겠다는 의지가 없다! 부정선거로 군부독재는 이어질 것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성난 시민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공정선거감시단과 시민들이 결성한 투지결(투표함 지키기 결사대)은 긴급회의를 열었다. 서울시 대응에 강력하게 항의하는 것은 물론, 공권력에 굴복하지 않으리라 결의했다. 태주는 공권력이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전에 백골단이 전선을 흩뜨리고 혼란으로 몰아갈 전략을 쓸 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공포는 군중이 방심했을 때 치명적이고 효과적이었다. 새벽 여명이 밝지 않은 상태에서 손에 파이프를 든 백골단이 들이닥쳤다. 백골단은 시민을 한 명씩 다 잡을 심산이었는지 구청에 모인 시위 군중만큼 많았다.
백골단은 최루탄 수백 발을 발사함과 동시에 시위대로 진격했다. 건국대 사건 때보다 상황이 더 안 좋았다. 시민들과 결사대는 독 안에 든 쥐였다. 목숨 바쳐 끝까지 투표함 사수하자던 시민 일부는 혼비백산해서 구청 밖으로 뛰쳐나갔다. 백골단과 난타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투표함을 뺏겼다. 최루탄은 구청 건물 안까지 발사되었다. 맵고 역겨운 최루가스에 눈물, 콧물을 쏟아 낸 시민들이 자욱한 연기 속에서 메뚜기처럼 흩어졌다.
태주는 투표함을 지키던 민청련 동지들에게 옥상으로 도망치라 손짓했다. 5층 건물 옥상으로 도망가던 서울 법대 새내기가 계단에서 백골단 몽둥이에 다리를 맞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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