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의 캠퍼스는 빛난다. 아직 추위가 남아 있어 조금은 으스스하지만 긴 겨울을 헤쳐나와 힘차게 대학 문을 열어젖힌 신입생들의 생기가 가득하다. 캠퍼스의 꽃은 바로 새내기들이다. 매 학기 1학년들을 만나지만 3월 학기가 더 신선한 것은 당연하다. 수많은 새로움에 노출된 그들은 진지하고 의젓하다. 1학년 1학기 첫 강의에 나서는 교수도 마음이 예사롭지 않다. 동토를 뚫고 나온 그들의 노력과 의지에 경의를 갖게 되고 막 올라온 새싹들에게 친절함과 세심함을 보내게 된다. 중·고등학교 학창시절과는 전혀 다른 환경과 수업 방식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숙제이다.
인생 또한 숙제이다. 엄마 뱃속에서 세상의 소리를 듣고 이해하다가 눈부신 다른 세계로 나와 호흡해야 하는 첫 번째 숙제! 전혀 다른 주변 온도에 놀랄 사이도 없이 울음을 터뜨려야 하는 아이는 얼마나 힘들까. 가만있어도 양분이 공급되었는데 이제는 힘차게 빨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력으로 버텨야 하는 시간은 또 어떨까. 엄마의 내부에서 세상을 느꼈는데 그 웅성임과 전혀 다른 세상이 주는 수만 가지 신호는 왜 그리 복잡하고 어려운지!
어른이 되고 나면 잘 기억나지 않겠지만 아기들은 그맘 때 다 처리할 수 없이 퍼부어지는 정보 처리, 즉 숙제의 연속으로 혼란을 경험한다. 그렇게 먹고 자고 숙제하면서 아이는 배밀이를 하고 뒤집고 기고 서고 걷는다. 환경은 제각각이다. 언제나 아이를 기다리는 일정하게 따뜻한 모유가 있는가 하면 때마다 온도가 다른 가짜 젖꼭지도 있다. 수많은 눈들의 관심 속에 자라나는가 하면 불운하게도 부모조차 보지 못하는 환경에서 살아 내기도 한다. 어찌되었건 그 모든 것이 아이 삶의 숙제이다. 인생은 숙제의 연속이기에. 오죽하면 ‘발달과업’ 이란 학술용어가 다 있겠는가.
학교에 가고, 군대에 가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조금씩 성숙하고 어른이 되어 간다. 다시 아이를 낳아 양육하고 학교에 보내고 아이가 취직하는 것을 본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후배 또는 제자가 자라나는 것을 지킨다. 이렇게 세대가 바뀌면 은퇴라는 것을 한다. 은퇴기에는 일반적으로 자녀가 분가를 하고 부모만 남는다. 결혼하지 않은 경우는 자녀와 무관하게 자신의 퇴직이 그 분기점이 된다.
은퇴 기간의 인생 숙제는 이제까지는 확연히 알려진 것이 많지 않았다. ‘노후’라는 말이 그렇듯 이 기간은 결코 길지 않았으므로 결혼하거나 자립하는 자녀들을 지원하거나 본인의 취미나 여가 활동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인생 100세를 넘어 120세를 바라보는 이 좋은 세상에서는 다르다. 여지없는 인생 2모작이 시작되므로. 가을에 추수하여 한숨 돌렸다 싶지만 곧바로 농한기도 없이 봄이 찾아오는 셈이다.
3월 새내기 신입생에게 강좌 소개를 하면서 학점 기준을 설명해 주려면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출석에다가 시험·과제와 발표, 그리고 평소 점수까지 잘 버무려져 있는 성적 정책은 복잡하지만 중요하다. 그 안에 확보되어야 할 객관성과 공정성·합리성은 그들과 내가 마음 놓고 즐겁게 한 학기를 지낼 안전망이다. 수천만 개의 숙제를 잘 수행하여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에게 새로운 과제들을 소개하는 셈이지만, 인생이 끝나지 않는 과제의 연속인 것을 어찌하랴.
대학 과정은 특정 과목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하면 재수강을 해야 졸업을 할 수 있다. 특정 과목의 실패는 그 강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숙제와 연관되어 있다. 학점 정책 안의 숙제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하면 당해 과목의 학점을 취득하지 못한다. 길어진 인생도 비슷하다. 60세 이후 생이 길어지다 보니 그 안에서 수행할 숙제가 하나하나 늘어난다. 윤회나 환생을 믿는 이들은 지난 생에 다 이수하지 못한 숙제가 우리를 이번 생의 삶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이번 생에서라도 갖가지 숙제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가까운 이들과의 채무를 청산하도록 권장한다.
공자님은 인생 과업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다.
“나는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굳게 섰으며, 마흔 살에는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는 천명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예순 살이 되어서는 무슨 말을 들어도 개의치 않았고, 일흔 살에는 마음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스승 공자의 고백대로라면 나이 60의 인생 숙제는 외부의 그 어떤 자극·어떤 일에도 개의치 않는 것이다. 70이 되면 자연의 이치가 체화되어 있는 상태에 도달한다. 자연의 법칙이 곧 인생의 무늬이므로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이 정도면 인생 고수가 아닌가. 밖에서 들어오는 어떤 것도, 내게서 나가는 어떤 것도 해가 되고 탈이 될 것이 하나도 없다. 공자님이야 성인이시지만 나 같은 보통 사람은 이 인생 숙제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그런데 이 숙제는 개인의 것만은 아니다. 개인이 모여 만들어진 공동체·가족·사회·국가·지구촌에게도 엄연히 숙제가 존재한다. 대한민국이 요즘 안고 있는 숙제 또한 잘 수행되기를 바란다. 성장하는 아름다운 조국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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