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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신원을 사칭해 미 기업 원격 근무자로 침투한 북한 요원들이 애니메이션 ‘미니언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이름을 즐겨 쓴다고 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달 가상화폐 업체에서 수년간 북한 요원들의 가상화폐 탈취를 추적해 온 조사관의 말을 인용해 이들의 깃허브 계정명이나 텔레그램 프로필 등에 이런 캐릭터 아이디가 빈번하게 등장한다고 전했다. 미니언즈 관련 암시가 등장하면 ‘(북한 요원 계정을) 제대로 찾았다’는 신호로 여기게 됐다고 조사관들은 말했다.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루(GRU)’라는 아이디를 발견했을 때, 처음엔 러시아의 군사정보를 전담하는 정보총국(GRU)을 가리키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서방을 목표로 한 사이버 공작의 주체가 대부분 중국·러시아·이란·북한이었으므로 선입견이 작용한 것인데, 알고 보니 2022년 개봉된 ‘미니언즈’에 등증하는 두목의 이름이었다.
‘최강 악당’(슈퍼 배드)을 꿈꾸며 벌이는 ‘허당’들의 에피소드로 대박 흥행을 낸 ‘미니언즈: 그루의 시대’는 소년 시절의 그루가 미니언들과 만나 악당이 되는 과정을 그린다. 2010년작의 프리퀄(작품 속 이야기보다 앞선 시기를 다루는 속편)인 셈이다. 캡슐 알약처럼 생긴 미니언들의 생김새부터 웃음을 자아낸다.
북한 사이버 요원들이 유독 ‘미니언즈’에 꽂혔다니 흥미롭다. 원격 취업 인터뷰 때 “(미니언즈) 슈퍼배드를 좋아한다”고 자기소개를 한 Grudev325 계정의 경우, 실력 부족으로 한 달 만에 해고됐으나 2년 뒤 6200만 달러어치 가상화폐 탈취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도 WSJ에 실렸다.
코로나19 이후 원격근무 증가와 인공지능(AI)의 발전으로 이들 사이버 요원들이 하위 정보기술(IT) 직종에 집중 침투할 수 있게 됐다고 미 당국 및 사이버 보안기업들이 설명했다. 네트워크에 악성 소프트웨어를 심어 기업 정보나 가상화폐를 빼 가는 이들 북한 사이버 요원의 연간 수익을 작년 유엔 보고서에선 약 2억5000만∼6억 달러(약 3300억∼8000억 원)로 추정했다. 미 조지아주 검찰은 이런 혐의로 북한 국적자 4명에 대해 수배령을 내린 상태다.
북한 같은 전근대적 폐쇄 사회에선 첨단 IT 종사자는 존재 자체가 특수한 사람들이다. 상반된 두 세계 사이를 오가며 범죄이자 국익 창출 수단인 업무에 임해야 할 이들은 아이디 선정 시 ‘최대한 들키지 않도록’ 친근함·호감 어린 이미지 포장을 중시하겠지만 그게 전부일 리 없다. 본인들이 의식하든 못 하든 소속 체제와의 ‘거리두기’ 내지 일종의 ‘허세’ ‘자기 위안’ 효과 등의 복합 요인이 작동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런 일을 (어쩔 수 없이) 하고 있긴 하지만 난 사실 이런 사람 아니야’라는 식의 ‘탈(脫)동조화’ 심리가 중요하게 작용할 것 같다.
‘세계 최강 악당’이 꿈인 ‘허당들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라는 역설이야말로 미니언즈가 지닌 매력의 비밀이다.
중세 프랑스어에서 기원해 영어로 흘러든 ‘미니언’이란 단어는 본래 ‘귀염(총애)받는 자’를 의미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미묘한 조롱과 비하의 뉘앙스가 더해졌다. ‘시시한 부하(심복)’ ‘권력자의 아첨꾼’, 나아가 ‘연인’(동성 포함)의 뉘앙스까지 추가됐다. ‘귀여운 남자·여자’를 일컫는 현대 프랑스어 ‘mignon·mignonne’도 같은 어원을 갖고 있으며 긍정적·부정적 양쪽 의미로 다 쓰인다.
영화 속 미니언들은 문법·어휘·발음 체계 모두 일관성 없이 뒤죽박죽인 ‘혼종 횡설수설’ 언어를 쓰면서도 자기들끼리의 소통엔 아무 문제가 없다.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일본어 단어를 차용하면서 군데군데 언어유희적 소리를 섞었다고 감독이 밝힌 바 있다. 국경과 인종을 넘어선 초국가적 캐릭터성이 확보되는 동시에 ‘복종에만 익숙한 존재’인 미니언즈의 정체성 부각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북한 사이버 요원들은 ‘미니언즈’에 나오는 이름들을 쓰다 보면 ‘정권 유지의 첨병’ 역할을 하면서도 ‘내게 이 일을 시키는 권력이 과연 위대한가’ 등의 회의를 가질 수밖에 없다. 미니언즈의 ‘허당성’ ‘무목적성’에 스스로를 투영하기 쉽다. 귀엽고 어수룩해 보이는 미니언즈이지만 존재 자체가 세상 권력 시스템을 풍자한다. 강자인 척하는 권력자의 허세를 부추기면서 조롱하는 이중적인 캐릭터인 것이다. ‘정권이 시켜서 하지만 내 정체성은 다르다’ ‘그래도 내 능력이 되니까 이런 일에 동원된다’는 등의 모순된 심리가 혼재할 수밖에 없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사를 두고 2007년에 출발한 프론티어스 미디어 산하의 잡지 ‘프론티어스 사이콜로지’는 최근 디지털 환경에서의 자아·정체성, 인간과 기술의 상호작용 연구를 활발히 수용하며 이 방면에서 권위를 높여 온 학술지다. 하지만 네티즌들이 오프라인 정체성과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히 다른 가상 자아(가명·캐릭터·허구 인물)를 의도적으로 구축한다는 점이 지적된 지 오래다.
‘프론티어스 사이콜로지’에 실린 여러 논문을 보면 온라인 아이디를 은폐나 위장 수단이상의, 즉 ‘자의식이 담긴 정체성 구성 전략’으로 보는 해석이 근거 있음을 알 수 있다. 북한 사이버 인재들이 ‘미니언즈’ 캐릭터 명칭을 애용하는 것을 자의식·냉소 등 정체성 균열이 반영된 것으로 읽을 만한 여지가 충분하다.
해외 프리랜서로 위장한 외화벌이 일꾼인 이들 북한 사이버 요원에겐 미니언즈 아이디 사용이 자기보호의 기제이자 ‘미세한 저항’ ‘냉소 속 자존감 유지 장치’, 체제 안팎을 오가며 생존하는 ‘디지털 경계인의 비공식 선언’일지 모른다.
영화 속 미니언들이 나름 소속감도 개성도 강하듯,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닫힌 세상에서 자란 인재들이 해외 IT개발자 커뮤니티에 녹아들며 보편적 유대감을 향한 갈증과 탈북의 갈망을 키우는 것 또한 인지상정 아닐까.
‘체제 내’에서 훈련됐지만 ‘체제 밖’에서 움직이고 개별 행동하는 이들이 미니언들처럼 종종 그루의 뜻에서 엇나가거나 실수로 계획을 망치는 상황이 없으리라 장담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는 역시 자기 생존을 추구하지 않을까 싶다. 이들의 탈북이나 정보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정권 차원의 노력이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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