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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요약할까. 쉽지 않다. 필자는 이것을 학대받는 사람의 이야기라 규정해 본다. 이 세상은 결코 정의롭지 않다. 이 인식은 아프다. 너무나 끔찍한, 날카로운 통증과도 같은 깨달음이다.
여기 ‘김독자’라는, 한 비정규직 사원이 있다. 그에게는 학대받았던 학창 시절의 고통이 가슴 깊이 새겨져 있다. 지울 수 없다. 완력이 강한 자들에 둘러싸여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는 것보다 더 절망적인 것이 있을까. 법은 멀리 있고 주먹은 바로 앞에 있는 어린 시절에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현실이기도 하다.
‘김독자’는 어떤 작가의 길고 긴 소설을 읽는 마지막 ‘독자(讀者)’다. 그러면서, 누구나 살아내야 할 ‘생존경쟁(struggle for survival)’ 앞에 선 단 한 사람, ‘독자(獨者)’이기도 하다. 이 세계에서 그는 고독하다. ‘생존경쟁’은 다윈의 진화론의 중요한 테마다. 오해되었든 그렇지 않든, 사람들은 이 ‘생존경쟁’이 다윈의 믿음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생존경쟁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한, 홉스식의 ‘만인 대 만인의 투쟁(a war of all against all)’ 상태에 놓여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런 세계에서 과연 ‘김독자’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살아남는다면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하나의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Last Exit to Brooklyn)’가 있다. 그것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남는 길이다.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표트르 크로포트킨은 절대 명제처럼 여겨지던 다윈의 학설에 의문을 품었다. 그는 연구 끝에 ‘상호부조론(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을 썼다. 여기서 그는 경쟁보다 오히려 상호부조, 곧 서로 돕는 것이 집합적 개체들의 생존을 위해 더 큰 기능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단지 진화의 ‘한’ 요소일 뿐이라고 제목을 단 것은 이 책의 주제를 역설적으로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영화 속 ‘김독자’는 필자의 해석에 따르면 크로포트킨 ‘신봉자’다.
한국에서 1920년대 중·후반에 이 ‘크로포트킨주의’가 논란의 중심으로 떠오른 적이 있다. 급진주의적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는 이들을 내쫓고 단체를 레닌주의적으로 ‘순결하게’ 재구축하고자 했다. 그때 권구현 같은 크로포트킨주의자는 당시 신생 소비에트연방(소련)에서 만연하던 우상숭배가 ‘무산자주의’의 대의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노동하는 대중의 가치를 높게 치는 ‘무산자주의’가 어떻게 ‘일인 숭배’를 정당화할 수 있단 말이냐. 권구현은 이런 모순을 곧이곧대로 승인할 수 없었다.
영화 속에서 ‘김독자’는 자신이 마지막 한 사람의 독자로서 끝까지 읽어 낸 긴 소설이 그 주인공 유중혁이 혼자 살아남는 것으로 끝난다는 사실에 깊이 실망한다. “작가님, 이 소설은 최악입니다.”
‘김독자’는 학대받은 자였고, 현재에도 비정규직으로 직장을 그만두는 ‘학대받는 자’이지만 이 경쟁의 세계에서 혼자 살아남는 길을 승인할 수 없다. 그의 필생의 과제는 처절한 동물적 생존경쟁이 선사한 학대의 상처를 극복하고 ‘함께’ 살아남는 새로운 생존의 윤리를 찾는 것, 그리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그는 동호대교에서 시작된 ‘버츄얼 스페이스(virtual space·가상공간)’의 생존 게임에서 이 새로운 윤리를 목숨을 걸고 지켜 내는 영웅적 투쟁을 벌인다.
이 새로운 투쟁 속에서 그가 읽은, 최후의 강자 ‘유중혁’이 혼자 살아남고 그럼으로써 이 세계가 끝내 사라져 버리고 마는 원작 소설의 시나리오는 조금씩 다르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조금씩의 ‘차이’가 축적되어 결말의 거대한 변화로 연결된다.
영화 속에서 ‘김독자’는 분노의 괴물 ‘화룡’을 상대로 최후의 투쟁에 돌입하며 ‘서로 돕는 새로운 스킬(skill)’로써 괴물을 쓰러뜨리고, 투쟁에 패배해서 목숨을 잃은 ‘유중혁’까지 살려내고야 만다. 세상에 자기 혼자만 살아남는다면 그 세상은 이미 소멸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다.
필자는 이 변경된, 변경되는 시나리오에 매력을 느낀다. 이것은 현실에 대입할 만하다. 현실의 현재적 상황은 어떤 ‘시나리오’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모든 것은 계획 없이, 기획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기에 한 사람의 ‘김독자’가 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에 대해 ‘죄’를 짓고, 그 ‘죄’로 인해 진실을 은폐하지 않을 수 없는 체제를 이제는 끝장을 내야 한다고 결의한다. 그는 예정된 ‘시나리오’를 향한 도전을 감행한다.
옛날에 어렸을 때, 대전 변두리 서대전역에서 멀지 않은, 논밭으로 둘러싸인 작은 동네에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가 있었다. 이 놀이는, 기억에 분명하게 남아 있지 않은데, 생존 게임 같은 ‘살아남기’ 놀이다.
게임에서 진 아이는 처형대에 세워진다. 아이는 담벼락에 배를 붙이고 두 팔을 양쪽으로 벌리고 이긴 아이들에게 등을 보이고 선다. 이 아이는 아이들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볼 수 없다. 이긴 아이들이 진 아이를 향해 차례로 고무공을 던진다. 아이들은 아이들이어서 자비심이 없다. 그냥 재미있는 놀이일 뿐이다. 아니, 아이들은 이미 인간이다. 인간다운 냉혹함이 이미 그네들의 심장에 내장되어 있다. 처형대에 선 아이가 언제 공이 날아올지 몰라 두려워하고, 공을 세게 맞고 괴로워하는 것을 이긴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즐긴다.
이 아이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스스로를 민중이라 믿는 ‘아이’들이다. 민중이 그네들의 편이라고 ‘스스로’ 믿는 지식인들이다. 때로는 귀한 민중들이, 기획된 시나리오에 맞추어 ‘동작하고’, 이 시나리오 속에서 주인공을 학대하는 악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이 많다.
영화 속에서 ‘김독자’가 마주치는 금호역의 ‘다중들’, 그네들은 금호역을 지배하는 국회의원 천인호의 거짓 선동에 넘어가 오히려 ‘김독자’를 공격한다. ‘다중(multitude)’은 자유와 해방을 향한 본능적 충동에도 불구하고 때로 괴물 같은 ‘무리(mob)’로 변질되어 무서운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지금 처형대에 선 ‘김독자’는 예정된, 미리 주어진 ‘시나리오’를 바꾸고자 한 예외적인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학대당했지만, 학대당하고 있지만 서로를 학대하는 처절하고 비인간적 상황에서 이 세계를 구원하고자 했다. 이 과제는 단 하나뿐인 목숨을 걸어야 하는 투쟁이었다. 처절하게 고독한 ‘독자(獨者)’의 길이었다.
기획된 ‘시나리오’를 바꾸려는 새로운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는 이 바뀐 시나리오의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 ‘전지적’ 독자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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