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기장군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 고리2호기의 수명연장 심사를 둘러싸고 절차적 정당성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핵심은 중대사고 발생 시 대응전략을 담은 ‘사고관리계획서’에 대한 심사 없이 계속운전 심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민사회단체와 방사선비상계획구역 내 거주 시민들은 “사고관리계획서부터 심의하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은 최근 고리2호기 계속운전 심사를 이달 중 마무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는 이 결과를 바탕으로 운영변경 허가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고리2호기는 1983년 가동을 시작해 2023년 4월8일 설계수명을 다해 중단된 상태다. 문재인 정부 당시 영구정지를 예고했지만 윤석열 정부의 원전 활성화 방침에 따라 수명연장이 추진됐다.
사고관리계획서는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이후 도입된 제도적 장치로 중대사고 발생 시 조치사항과 대응전략을 명시한 핵심 문서다. 고리2호기 관련 계획서는 이미 2019년에 제출됐지만 2022년까지 완료하기로 했던 심사는 현재까지도 마무리되지 않았다. 원안위는 “계속운전 심사와 사고관리계획서 심사는 별개”라는 입장이지만 시민사회는 “최신 기술 기준에 부합하지 못해 심사를 미루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유에스더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기후팀 활동가는 “사고 관리 계획서가 아직 심사되지 않았음에도 수명 연장 심사가 진행되는 것은 명백한 절차 위반이다. 중대 사고에 대한 대응 방안을 담은 이 계획서는 안전성 판단의 핵심인데 이를 배제한 채 수명 연장을 논의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유 활동가는 “고리 2호기 같은 노후 원전은 최신 안전기술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심사를 미루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다”며 “정말로 안전한 수명 연장을 추진하려면 최소한 사고 관리 계획부터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민단체는 이에 맞서 지난달 29일부터 이달 9일까지 고리2호기 방사선비상계획구역 내 거주 부산시민 500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서명에는 “중대사고를 제외한 수명연장 심사는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우려가 담겼다. 시민들은 11일 서울 중구 남창동에 위치한 원안위에 이 서명을 전달하고 기자회견을 통해 절차적 위반을 규탄했다.
시민단체 한 관계자는 “사고관리계획서 심사 없이 수명연장을 허가하는 것은 주민 생명권을 경시하는 행위”라며 “방사선 환경영향평가에서도 중대사고는 제외된 상태다. 이는 원안위가 스스로 밝힌 ‘중대사고는 사고관리계획서에서 다룬다’는 원칙을 뒤엎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도 이 같은 절차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한 에너지 정책 전문가는 “사고관리계획서는 원전 안전성 판단의 핵심”이라며 “이를 심의하지 않고 수명연장을 논의하는 건 국민 불신을 자초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계획서의 대다수가 비공개되어 시민이 안전성을 독립적으로 검증할 수도 없다”며 정보 투명성 문제도 함께 짚었다.
이번 사안은 행정 절차를 넘어 원전 안전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중요한 이슈로 평가된다. 사고관리계획서 심사 없이 고리2호기의 수명연장을 밀어붙일 경우 그 책임은 고스란히 원안위와 정부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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