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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지만 왕의 무덤만큼 사연 많은 무덤도 없을 것이다. 왕의 삶이란 게 태어나면서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 특별함 그 자체였을 테니 말이다.
동구릉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왕릉이란 뜻이다. 경기 구리 동구릉은 조선을 세운 태조부터 이하 왕들의 능이 모여 한국 최대의 왕실가족묘지를 이룬다.
이곳 9개의 무덤에는 17인의 왕실 가족이 잠자고 있다. 그들은 공인이지만 각자의 역사를 가진 개인이었다. 그러므로 동구릉에는 17개의 역사가 묻혀 있는 셈이다.
장마철 산책에 제격 동구릉 숲
동구릉은 규모가 큰 만큼 왕릉 곳곳에 숲길이 나 있다. 잘 가꾸어진 나무가 그윽한 시간을 품고 있고 묘비와 봉분, 석상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장마철 산책 코스로 제격이다.
매표소와 홍살문을 지나면 갈참나무와 소나무로 이루어진 거대한 숲이 나타나는데 9기나 되는 왕릉을 연결하는 순환로는 그 자체로 삼림욕 코스다. 더욱이 장마 때는 피톤치드의 농도가 올라가 삼림욕의 효과가 배가된다.
삼림욕은 단순한 민간요법이 아니라 유럽과 일본 등에서 널리 애용되는 근거 있는 건강법이다. 나무가 발산하는 많은 양의 산소와 피톤치드는 스트레스 해소와 질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 동구릉 순환로만 따라 걸어도 한 시간 너머 삼림욕을 즐길 수 있다.
동구릉은 처음부터 그 이름이 아니었다. 무덤이 생길 때마다 홀수로 이름을 붙여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1855년 수릉을 끝으로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조선 왕조가 이곳에 아홉 왕의 무덤을 들인 것은 그만큼 이 땅이 명당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어떤 명당도 조선의 몰락을 막지 못했으니 명당이란 게 정말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한편 경기 고양에는 서오릉이 있어 서쪽 명당을 담당하고 있다.
동구릉은 북쪽 중앙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이 자리한다. 태조 건원릉을 제외하고 대부분 두 개 이상의 봉분을 이어 붙인 연릉이다. 많게는 세 개의 봉분이 붙어 있기도 하다.
24대 헌종의 능인 경릉(景陵)에는 왕과 왕비 2명이 나란히 묻혀 있어 조선 왕릉 유일한 삼연릉을 이룬다. 왕을 가운데 두고 두 왕비가 좌·우에 묻혔을 것 같지만 ‘우왕좌비’ 원칙에 따라 왼쪽에 헌종 능이 있고 가운데에 효현왕후 김씨, 오른쪽에 계비 효정왕후 홍씨가 묻혀 있다.
다른 능은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현릉 △14대 선조와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명성황후와 다른 사람)의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원릉 △추존 문조(효명세자)와 신정왕후의 수릉으로 전부 쌍릉이다.
조선 왕릉의 외적 기준이 된 건원릉
단독 능인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은 단정하게 예초된 다른 왕릉에 비해 억새(청완)가 무성한 ‘장발’ 왕릉이다. 예초를 아주 안 하는 것은 아니고 한식을 맞아 1년에 한 번만 한다. 또 이날은 1년에 단 하루, 일반인에게 건원릉의 접근을 허락하는 날이기도 하다.
건원릉이 장발 능이 된 데는 사연이 있다. 야사에서 이성계는 죽음을 앞두고 고향인 함흥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 태종(이방원)은 나라의 위신과 제사의 편리성을 생각해 아버지를 도성 근처에 모셨다.
그래도 아버지의 유언을 아주 어기는 게 마음이 안 편해서 함흥 땅의 흙을 억새 채 떠다가 능을 단장했다고 한다. 이방원은 숱한 살인과 숙청을 거듭하며 형제의 왕위를 찬탈한 천하의 야심가였지만 효심만은 지극했다.
그런데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기도 하지만 고려의 장수였다. 장발 무덤은 장수라는 이성계의 정체성에 잘 부합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을 창시한 인물인 만큼 태조의 무덤 꾸밈새는 매우 화려하다. 12각으로 된 화강암 호석에는 길함을 상징하는 태극·구름·십이지신·영지를 각각 새겼으며 주변에 석호와 석양을 배치해 무덤을 지키도록 했다.
또 무덤 아랫단에는 석마가 딸린 문인석과 무인석 한 쌍을 배치해 능의 위엄을 더했다. 건원릉의 정자각과 비각 내 신도비는 대한민국의 국가유산인 보물에 지정돼 있다.
건원릉이 얼마나 대단한 무덤인가 하면 구리시 돌다리 사거리부터 도매시장 사거리까지의 길 이름이 건원대로다. 또 추존왕의 왕릉을 포함해 모든 조선 왕릉을 통틀어 유일하게 능호가 ‘건원’ 두 자다.
영조대왕의 비석은 두 개
사극에 단골로 등장하는 영조의 능에도 독특한 사연이 깃들어 있다. 원릉(元陵)은 조선 제21대 국왕인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경주김씨의 합장릉이다.
원래 영조의 능은 고양 서오릉의 정성왕후 홍릉에 미리 조성되었으나 영조 승하 후 현재의 위치에 새롭게 조성하면서 노론 벽파의 지지를 받았던 정순왕후와 합장했다. 그리고 원릉이 옮겨 오면서 그 자리에 있던 효종의 영릉은 경기도 여주로 옮겨 가게 됐다.
또 영조의 비각은 ‘영종대왕’ ‘영조대왕’ 두 개다. 이는 승하 후 묘호가 영종이었으나 1890년(고종 27) 영조로 바뀌면서 비각을 새로이 세웠기 때문이다.
2023년 경복궁 광화문 월대를 복원하면서 동구릉에 남아 있던 난간석과 용두석 등 부재 40여 점을 사용했다. 일제는 조선의 궁궐을 훼손하면서 부재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는데 눈 밝은 학자들이 동구릉에 있는 석재가 광화문 월대인 것을 알아보고 이동 조치했다.
여기에 이건희 전 삼성 회장 유족 측에서 기증한 서수상(瑞獸像)을 배치하면서 광화문 월대 복원이 속도를 내게 됐다. 서수는 머리에 뿔이 달리고, 목에 갈기털이 난 상서로운 동물로 광화문 월대의 맨 앞부분을 장식했던 돌조각상이었다.
그동안 동구릉에 가려면 버스나 승용차를 이용해야 했지만 작년 8월, 지하철 8호선 동구릉역이 새로이 개통됐다. 역 3번 출구에서 동구릉까지는 도보로 10분(700m)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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