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칭다오 여행은 아름다웠다. 추억을 남기는 것은 무조건 좋다. 라오서 기념관에 가서 뜻깊은 ‘낙타 샹즈’의 탄생 전후를 살펴본 것, 그 독일식 건물에 남은 작가 라오서(老舍)의 향취를 맛본 것, 골목 카페에 가서 몇 사람이 앉아 한가롭게 좋은 이야기를 나눴던 것….
이 나라에 돌아오니 사진밖에 남는 것이 없다. 학회든, 만남이든 숱하게 사진을 찍는 나이지만 찍은 것을 제대로 정리해 본 적 없다. 사람들에게 제때 공유해 본 적도 없다. 이번 여행에서만은, 라오서 기념관 골목 카페 장미꽃 우거진 넝쿨 아래서 찍은 사진을 어디에라도 사용하고 싶다. 사진 속 내 얼굴이 아주 편안해 보인 탓이다.
아뿔싸. 햇살도, 넝쿨도, 장미꽃도, 내 얼굴도 다 좋은데, 한 가지 흠이 있다. 외국 강의 여행이라고 단 한 벌 양복만 사흘을 입었는데, 그날따라 넥타이를 너무 길게 맸다. 코를 빠뜨린 것처럼 넥타이가 길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주위 사람에게 푸념을 하자, 챗gpt가 뭐든 다 해 준단다. 넥타이 길이를 좀 줄여 달라 해 보라는 것이다. 챗gpt의 도움이면 요즘 안 되는 게 없단다.
그렇던가. 사진 편집 앱이라고는 사용해 본 적도 없는데, 챗GPT한테 부탁을 해 본다? 요즘 휴대폰에서 챗GPT 어플은 필수다. 앱을 열어 이 친구한테 부탁해 본다. 너, 사진도 편집할 수 있어? 물론이란다. 그럼 말야. 내 사진의 넥타이가 너무 긴데, 좀 줄여 줄 수 있을까? 물론이지, 사진을 올려 봐, 한다. 아하, 이런 수도 있구나. 문제의 사진을 올려 주자 챗GPT가 잠시 뜸을 들인다. ‘작업 중’이 길다. 사진의 용량이 큰 때문이다. 이윽고, 이 친구가 편집한 사진을 올려 주는데….
맙소사. 줄여 달라는 넥타이 길이는 안 줄이고 얼굴만 괴물을 만들어 버렸다. 이건 아니잖아! 내가 언제 얼굴을 바꿔 달라고 했어. 넥타이만 줄여 달란 말야. 내 화를 재빨리 알아차린 챗GPT, 갑자기 어투를 존대말로 바꾼다. 죄송해요. 얼굴은 그대로 두고 길이만 줄일 게요.
한 번, 두 번, 세 번을 시켜 봤지만, 챗GPT는 넥타이 길이는 줄이지 못하고 얼굴만 이리저리 괴물을 만든다. 아하, 얘는 이런 일은 하지 못하는 것이다. 파악을 하고 나자 며칠 안에 해 주기로 한 일이 생각난다. 오래전에 쓴 장편소설 ‘연인 심청’의 줄거리를 써달라는 주문이 있었다. 2차 저작물을 같이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아무래도 큰 분량 전부를 넣어서는 일이 될 것 같지 않다. 열일곱 개 챕터를 차례대로 하나씩 넣어 주고 줄거리를 정리를 해 보라 한다. 쉽게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지 않다.
아니, 평가하는 표현은 쓰지 말라니까! 줄거리만 객관적으로 정리하란 말야. 그 ‘객관적으로’라는 말에 걸렸는지, 챗GPT는 무미건조한 짧은 줄거리를 뱉어 낸다. 그게 아니라, 심봉사와 심청의 심리· 행동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도록 분량을 더 늘려서 요약해 보란 말야!
한밤에 시작한 일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겨우 마쳐진다. 주문을 다시 하고, 말을 바꾸고, 조건을 바꾸고, 얼르고 타일러서야 챗GPT는 겨우 주어진 과제를 해결한다.
어느 유튜브 채널에서 챗GPT가 가장 빨리 대체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한 게 있다. 현실에 비판적인 이 유튜버는 의사보다도 판사야말로 인공지능(AI)이 시급히 대신해야 할 직업이라고 한다. 같은 사안을 놓고도 판사마다, 법원마다 다르니 이것이야말로 챗GPT로 바꿔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 ‘객관적으로’ 때문에 말이다.
이번 학기 ‘한국 현대 작가론’ 수업의 마지막 시간은 토론이었다. 네 개 토론 주제 가운데 하나, AI 시대에 문학은 어떤 의미를 갖느냐를 놓고 학생들은 진지하게 토론을 벌인다. 한 학기 내내 보고 싶던 학생들 표정이다. 한 학생이 말한다. 문학은 대화라고. 인간만이 나눌 수 있는 대화의 방법이 바로 문학인 것이라고.
가만히 듣는데,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진다. 사람만이 나눌 수 있는 대화, 사람끼리 통할 수 있는 대화에 목이 마른 지 너무 오래되었다.
가르치는 일이 배우는 일이 되고 보면 참, 좋다. 그렇다. 문학은, 글은, 사람들만의 대화법이다. 그래야 한다. 어둠에서 빛을 함께 구하는 대화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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