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자란(君子蘭)은 이름 뒤에 붙은 ‘난’ 자 때문에 난초의 일종으로 보기 쉽다. 또 유교 문화권에서 미덕으로 여기는 ‘군자’라는 말은 이 식물의 원산지가 동양일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계보를 살펴보면 군자란은 난초와는 거리가 먼, 백합목 수선화과에 속하는 식물이고 원산지는 남아프리카 나탈의 삼림이다.
꽃이 필 때는 잎과 별개로 꽃대가 솟아 나오고 그 끝에서 여러 송이가 한꺼번에 피어나 화려함을 더해준다. 잎을 주로 관상하는 관엽식물 군자란은 길게 뻗어 늘어지는 잎의 모습이 난초와 비슷하다. 꽃보다는 그 잎의 곧고 거침없는 자태 덕분에 ‘명예 군자’ ‘명예 난’이 된 것이 아닐까?
아프리카 동쪽 해안까지 진출한 정화의 함대
군자란은 명나라의 정화가 아프리카에서 들여온 귀화 식물이다. 정화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번에 걸쳐 서방으로 원정을 떠났다. 정화의 함대는 첫 원정에서 베트남 참파·시암·말라카·자바‧캘리컷·실론 등을 방문하고 4년 만에 돌아왔다. 그는 2차에서 7차까지의 원정에서 아프리카 동부 해안까지 방문했다.
정화의 원래 이름은 ‘마화’다. 그의 선조는 원나라 때 복속된 서양계 민족인 색목인으로 이슬람교도였다. ‘마’는 무하마드의 중국식 성이다. 환관의 우두머리 태감이 된 마화는 영락제로부터 정(鄭) 씨 성을 받았다.
여섯 차례 원정은 영락제 재위 시기에 행해졌고 나머지 한 번은 영락제 사후 선덕제 때 이뤄졌다. 명나라 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인 영락제가 원정을 시작하고 주도한 셈이다. 조카인 건문제 때 미숙한 황제를 간신에게서 구한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영락제는 1402년 황제가 되었다.
여섯 차례의 원정을 지원한 영락제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고 자금성을 지은 것도 영락제였다. 그는 도시의 성장을 꾀했고 비단길과 바닷길을 통한 광범위한 교역을 장려했다. 바다 밖 세상을 개척하기 위해 영락제는 수군을 창설하고 대규모 해상 원정단을 만들었다.
정화의 함대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기록에 의하면, 1차 원정 때는 길이 약 137m에 너비 약 56m에 달하는 대형 선박 등 62척의 함선이 동원되었고 탑승 선원만도 2만7800명이었다고 한다.
국제축구연맹(FIFA)이 정한 국제 경기용 축구장 규격이 68×105m인데 이보다 긴, 나무로 만든 역사상 가장 큰 배였다. 이는 콜럼버스 함대가 250t급 세 척에 선원 88명으로 구성되었다는 점과 자주 비교되곤 한다.
게다가 정화의 원정은 유럽의 대항해 시대보다 100년 가까이 앞선다. 이 원정의 목적은 침략이나 노략질이 아니었다. 서양인들이 원정과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행했던 원주민 학살이나 금붙이 약탈·노예 사냥·종교 강요 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정지에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난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 상대를 존중하여 공평하고 평화적인 거래로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정화는 원정으로 거쳐 간 나라들 외교사절단을 명나라로 데려와 경제나 문화 교류를 하도록 했다. 그 나라들과 군신 관계를 맺고 무역을 ‘허용’해 주는 것이 명나라의 외교 방식이었다. 명나라는 원정을 통해 교류하게 된 30여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음으로써 명나라의 힘과 위상을 만방에 과시할 수 있었다.
기린과 군자란 등이 중국으로 오게 된 계기
명나라는 이 항해로 연안의 해적을 소탕하고 대외 무역을 활성화했다고 하지만 이는 ‘조공 무역’이었다. 그러니 받아들이는 나라 입장에서는 명나라 기록과 다르게 말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아프리카 동쪽 소말리아 해안에는 어느 날 바닷가에 새까맣게 몰려왔다가 홀연히 사라진, 마치 외계인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에 대한 얘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고 한다.
영락제가 세상을 떠난 후 등극한 새 황제 홍희제는 국외 교역에 부정적이었다. “아무 소용없는 일에 국력을 낭비할 뿐”이라며 선단을 해산하고 항구의 선박 출입까지 금지했다. 홍희제 뒤를 이은 선덕제 때 7차 원정단이 다시 꾸려지긴 했다.
하지만 원정에서 돌아온 정화가 세상을 떠난 후 중국의 첫 해양 진출이자 마지막 원정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이후 명나라는 대륙의 문을 걸어 잠갔는데 그 지점에서 중국의 운명과 세계사의 향방이 크게 달라졌다.
원정단 규모가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 정도 크기의 목선을 만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 조공으로 받은 기린이나 코뿔소와 그 먹이까지 싣고 명나라로 돌아올 정도의 배 크기도 작다고는 볼 수 없다. 규모가 컸든 작았든, 본래 목적을 달성했든 못했든, 정화의 원정은 문화 교류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중 작은 예가 군자란의 전파다. 아프리카에서 정화 일행의 눈길을 끈 것은 기다란 이파리보다는 주황색으로 화려하게 피어난 꽃이었을 것이다. 계량화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 그 자체는 시대와 나라를 넘어서는 공통의 미덕이다. 그 미덕의 중심에 꽃이 있다. 꽃에 ‘군자’라는 이름을 붙여 외형적 아름다움에 내면의 미덕을 더한 우리 조상들의 군자란 사랑이 놀랍기만 하다.
[글 황인희 사진 윤상구]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