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황철, 2005년 2월 탈북
▲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재학
기념보고대회에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은 “군사강국으로, 당당한 핵보유국, 인공지구위성 제작 및 발사국으로 위용을 떨치고 한 차례의 세계대전과 맞먹는 사회주의 수호전에서 승리의 승리를 이룩했다”며 “이는 김정일이 가져온 역사의 기적”이라고 칭송했다.
필자도 북한의 이런 도발을 기적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15년 전인 1998년 8월31일 발사된 ‘광명성1호’ 소식을 접했을 때였다. 당시 북한의 경제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대학교의 한 끼 급식은 옥수수 13알이 담겨져 있는 맑은 죽 한 그릇이 전부였다. 영양부족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빈혈로 눈앞이 캄캄해지고 정신마저 혼미해졌다.
시장에선 인육이 돼지고기로 둔갑해 팔려 나갔고 살던 집마저 몇 kg의 식량에 팔고 옷장 속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부분의 주민들은 ‘미제를 우두머리로 하는 제국주의 연합세력의 제재 때문’이라는 당국의 선전을 믿고 있었으며, 언젠가는 이 어려움도 끝날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도 버리지 않았다.

▲ 미사일발사나 핵실험 후에 어김없이 진행되는 축하행사=전국의 모든 도시와 조직들에서 중앙의 지시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며 김정일, 김정은에 대한 칭송으로 시작해 충성맹세로 끝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진/필자제공>
대학가는 물론 전국이 축제분위기였다. 당시 북한상황으로 봤을 때 정말 기적이었다.
‘광명성 1호’ 발사성공소식은 이대로 붕괴될 줄 알았던 북한이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다시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주었고 칠흑 같은 밤바다의 등대와 같이 절망에 빠진 주민들에게 희망과 생기를 불어넣어준 원동력이 됐다.
수백만 아사자들의 목숨보다 더 중요했던 미사일. 이 미사일 한발로 김정일은 엄청난 효과를 본 것이다. 이후에도 북한당국은 수차례의 미사일 발사, 핵실험을 했고 그때마다 내부결속을 위한 선전선동에 열을 올렸다.

▲ 지난 2월 14일 평양에서 진행된 10만 군민연환대회 = 김정일의 유훈과 업적으로 핵실험이 성공했다며 김정일+김정은 띄우기에 동원된 평양시민들과 군인들. <사진=필자제공>
하지만 북한주민들의 분위기는 정 반대이다. 그 이유는 ‘광명성1호’에서 시작해 수차례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겪으며 얻은 학습효과와 외부에서 전해주는 소식들을 통해 당국이 왜 이런 선택을 하며 미사일 한발, 핵실험 한 번에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 붓는지에 대해 알기 시작한 것이다.
김정일의 생일인 16일 북에 있는 가족과 전화통화를 한 친구가 고향 주민들 속에서 수차례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했지만 여전히 경제난은 계속됐고 이번 핵실험도 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며 국제사회의 봉쇄와 제재로 생활은 더 악화될 것이라는 불안이 확대되고 있다며 최근동향을 전해 왔다.
그러면서 가족은 “미국 놈들에게 피해본 사람은 없어도 공산군(군인)과 순사(보안원)들에게 피해본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인민들은 전기도 없는 원시사회에서 추위와 식량난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인공위성과 핵무기가 무슨 소용 있나? 우리 목숨은 인공위성이나 핵무기의 부속(부품)한개 보다 못하다. 이참에 전쟁이라도 나서 다 쓸어버렸으면 좋겠다”며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 김정일의 생일을 71돌을 맞아 진행된 ‘김정일화 전시회’ = 최근 발사된 은하3호와 다양한 로켓들을 함께 전시했다. <사진=뉴시스>
이 말을 들으며 지칠 대로 지친 북한주민들에게 ‘철천지 원수’였던 미국과 대한민국이 독재를 끝장내 줄 희망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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