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 연재기획
이하배의 ‘소통과 열음’…[6]소통열음 인성열음-<4>같음과 다름 사이
비판에 응시하는 대면초월, 본질도 보고 문제도 극복
끊임없는 나아가는 초월 속에 잠복된 우리의 현실 개선 ‘그것이 곧 초월’
이하배 필진페이지 + 입력 2015-05-09 17:44:13
 ▲ 한국소통문화아카데미 이사장(성균관대학교 전 유학·동양학부 교수) ⓒ스카이데일리
대면하는 초월
 
같음과 다름의 논리는 ‘대면(對面)적 초월’의 개념과도 이어진다. 학문을 보는 눈, 학문이 보는 눈이 함께 커지기 위해서는, 작은 현실의 크기를 간과하여 고정하고 연장하는 데에로 나가는 현실 ‘외면적 초월‘의 방법이 아니라, 소외된 현실을 구체적으로 묻고 드러내고 넘어서 현실 ‘대면적 초월’의 방법이 필요하다.
 
작은 현실의 문제들을 묻지 않거나 못하고 간과하면서, 아니, 못 보고 지나치면서 고정하고 연장하는 것은, 같음과 정체에 빠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볼간(看) 자와 함께하는 간과(看過)에는, 보는 것이 약간은 들어 있다고 할 것이다.
 
동서양의 ‘큰 학자들’은, 불완(不完)의 크기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시대적 삶을 문제로 삼고 넘어서려 한다는 점에서, 어쨌든, 당시 ‘사회화’ 질서에 ‘일정한 방식으로 비판적’이라 할 것이다.
 
공자나 플라톤도, 율곡(栗谷, 1536~1584)이나 데리다(Derrida, 1930~2004)도 그랬다. 이는 현실로부터 나름대로, 일정한 방식으로 거리를 두려 했다는 것이다. 기존, 현존의 사회화 질서가 함께 (잘) 살기에 ‘모자랄’ 때, ‘작을’ 때, 학문은 이를 상대화시키고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고, 이들은 보이게, 안 보이게 본다.
 
하나의 이론이나 실천이 비판적일 수 있을 때, 문제를 보다 잘 묻고 드러내고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넓어져서, 보다 문제없는 내지는 문제 적은 삶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회가 철학을 외면하는 원인은, 먼저 철학이 사회를 외면함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얼굴, 시선,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는 일이 ‘외면(外面)’이다. 외면하지 말라, 거리를 두지 말라 하고, 동시에 초월하라, 거리를 두라는 주장은 모순처럼 들릴 수 있다.
 
철학이 함께하는 구체적 삶의 현실에서 동떨어진 문제를 묻거나, 이런 현실을 동떨어지게 다룰 때, 문제가 발생한다. 여기서, 거리를 둔다는 뜻은 현실 문제를 ‘안’ 다루거나 ‘못’ 다룬다는 뜻이다.
 
현실 문제를 다루는 일이, ‘작은 함께’의 현실에 ‘빠져’, 이에 ‘얽-매여 꼼짝 못하는’ 것을 뜻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크기, 삶의 크기를 묻는 학문은, 현실의 삶에서 우리가 함께 ‘사람다운’ 삶을 펼 수 없게 하는 물질적, 비물질적 조건들을 검토하며, 이들의 발생방식과 존재방식, 작용방식을 보다 체계적으로 드러내면서 문제들을 줄이고 넘어설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거리를 두지 말라’함은, 함께하는 구체적 삶 현실을 ‘외면(外面)’하지 말고 ‘대면(對面)’하라는 뜻이고, ‘거리를 두라’함은,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고 이 비판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을 지양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끊임없이 지향하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문제 많은 소외 현실을 ‘비현실적’으로 초월하며 거리를 두는 데에서, 두 방법이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소외된 실제현실을 간과하는 원인이자 결과로서의 현실을 고정하는 ‘외면적 초월’과, 소외된 실제를 ‘실제적으로’ 파악, 이해하고 극복하는 현실 개선·변혁의 ‘대면적 초월’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처음의 ‘비(非)현실’은 ‘현실이 못되는’, 비(非)-사실적이라는 것이고, 둘째의 그것은 현실을 비(非)-하다고, 틀렸다고 하는 것이다. 함께하는 삶을 ‘어렵게 하는’ 실제 삶의 제 조건들에, 관심을 갖고 이를 문제로 삼으며, 넘어서려는 ‘대면적 초월’이 ‘대면적 거리두기’요, 그 반대가 ‘외면적 거리두기’라 할 것이다.
 
대면적 초월에서 대면은 ‘같음’의 범주에 그리고 초월은 ‘다름’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 초월도, 초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결국은 대면되는 우리의 문제 많은 현실로 돌아와서, 이를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이어진다할 것이다.
 
아니, 개선 자체가 하나의 초월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세상 간의 거리’의 문제인 거리 두기는, 결국, ‘인간 간 만남의 거리를 조절하고 관리하는’ 문제, 그리하여 일종의 인간관계의 문제와 연결된다 할 것이다. 이는 세상크기가 만남크기, 나아가, 사람크기, 삶의 크기를 묻는 차원에서 물어진다는 의미라 할 것이다. ‘좋은 실천’을 위하여 ‘좋은 앎’을 찾아간다고나 할까?
 
나누며 함께해온 삶은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을 더욱 가깝게 만들고 있다. 현대의 메트로폴리스에서, 나와 너들 그리고 그들은 가까이 바로 곁에 있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인구가 늘어나고, 해서 먹고사는 일이 분화되고 늘어날수록, 우리들의 삶은 서로에게 더욱 강하게 달려 있게 된다.
 
물질적, 정신적 자급자족(自給自足)에서 더욱 강하게 ‘타급자족’(他給自足) 내지는 ‘자급타족’(自給他足)으로 변해 갈수록, 우리는 그만큼 거리 없이 가까이 사는 것으로 된다. 타급자족(他給自足), 자급타족(自給他足)은 남이 만들어 내가 쓰거나, 내가 만들고 남이 쓰는 것을 이른다.
 
지하철 속에서 무릎들이 서로 곁-닿을 때나, 시선들이 서로 맞-닿을 때, 남들의 손길과 ‘정신길’이 묻어 있는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책을 보고 이해할 땐, 남과 나의 직접적, 간접적 거리는 과연 ‘무(無)-거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런 메트로폴리스의 현실은, 동시에 ‘거리’ 혹은 ‘소외’라고 해야 한다. ‘무거리’를 왜 ‘거리’라고 해야 할까? 함께하는 삶의 물질적 차원에서는 과연 ‘무거리’지만, 정신적, 정서적 혹은 ‘인간적’ 차원에서는 그림이 달리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는 나와 너가 금방 남과 남으로 변한다.
 
그리하여 ‘우리’라고, ‘함께’라고 할 수 있는 면이 별로 없게 된다. 그리하여 너는 너, 나는 나인 ‘남남’만이 성립된다. 물질적, 정신적 양 차원에서 보면, 너와 나의 관계는 통하면서도 막힌 ‘통이색’(通而塞)의 관계가 된다. 함께이지만, ‘진정한’ 함께가 아니기에, 이를 우리는 ‘따로 속의 함께’라는 것이다.
 
그리고 산업화, 도시화가 진행될수록 심화되는 양극화 내지 수직화 속에, ‘적은 큰’ 사람들만이 하나의 ‘큰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고, ‘많은 작은’ 사람들은 이들에 쉽게 좌우되면서, 이들은 하나의 ‘작은 삶’,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거의 비인간적인 삶을 살게 된다.
 
인간이 불인(不仁), 불의(不義), 무례(無禮), 반례(反禮), 부지(不智)의 인간관계 속에서 사물화(事物化), 사물화(死物化) 내지는 동물화(動物化) 되면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작은 비인간이 될 때, 인간들은 서로의 거리를 번번이 확인하면서 소외된다. 이런 비인간은, 아쉽지만, ‘별유천지(別有天地) 비인간(非人間)’의 그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대면적 초월’은 ‘안에서 밖으로서 머물기’이다. 이는 ‘같음에서 다름으로 있기’로 이끈다. 이는 이상(異常)한 일상(日常)에 ‘붙기’이면서, 동시에 이 이상(以上)의 이상(理想)을 찾아 이로부터 ‘떨어지기’이다.
 
안과 밖 가운데 하나에 붙들리고 빠져 머물면, ‘작은 삶’은 반복되고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안으로 빠지면서 밖으로 떨어지려는, 대면적 초월 혹은 초월적 대면의 방법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초월의 크기는 대면의 크기를 키우고, 대면의 크기는 다시 초월의 크기를 키우게 된 것이다.
 
대면은 초월을 생각하는 대면이고, 초월은 대면을 생각하는 초월이기 때문이다. 이것도 결국은 다름 속 같음, 같음 속 다름의 한 문제라 할 것이다.
후원하기
  • 정기 후원
  • 일반 후원
  • 무통장입금: 하나은행 158-910019-39504 스카이데일리
  • 스카이데일리는 온라인 판 스카이데일리닷컴과 32면 대판으로
    매일 발행되는 일간종합신문 스카이데일리(조간)를 통해 독자 여러분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후원자 분들께는 지면광고를 하고자 하실 경우
    특별 할인가격이 제공됩니다.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0
감동이에요
0
화나요
0
슬퍼요
0
댓글 : 0
오늘자 스카이데일리
주요 섹션 기사
주소 : 서울 특별시 중구 새문안로 26(충정로1가, 청양빌딩) 7층 | 전화 : 02-522-6595~6 | 팩스 : 02-522-6597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시 아01703, 등록일 : 2011년 7월 18일, 발행·편집인: 민경두, 편집국장: 고동석
사업자 번호 : 214-88-81099 후원계좌 : 158-910019-39504(하나은행)
copyrightⓒ2011, All rights reserved. Contact : skyedaily@skyedaily.com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선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