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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32] 위선자들의 관용
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6-25 06:30:13
 
 
 
승연의 짧은 외마디는 절정에 도달했다는 신호였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면 찾아오는 고요의 시간에 남편은 정적을 깼다. 좋았어? 승연은 대답 대신 생수 한 통을 들이켰다. 남편은 승연의 반응을 기다렸다. , 좋았어. 그런데 이런 느낌이 아주 오랜만이라 뭐가 좋은 건지 잊고 있었네. 승연은 좋았는지 안 좋았는지 알 수 없었다. 장소가 바뀌었다고 육체적 교감도 달라졌을 거라는 사실은 믿기 힘들었다. 다만, 묵은 과제 한 가지씩 줄이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낡은 하나를 버리기 위해 새로운 하나를 시도한다는 미덥잖은 논리를 적용하고 있었다. 승연은 애써 그런 노력을 스스로 하고 있었다. 잊기 위해서 새로운 집중이 필요한 것뿐이라고.
 
남편은 멋쩍은 웃음 소릴 냈다. 냉장고에서 시원한 생수병을 꺼냈다. 한 모금 벌컥 삼키면서 이제 우리 자주 나오자. 그동안 너한테 소홀했다, 내가 미안.” 승연은 남편의 진심이 아니라 기분이 좋은 나머지 꺼낸 순간의 선심이란 걸 알았지만 별 대꾸하지 않았다. 한껏 들떠 있는 상태인 남편에게 찬물을 끼얹긴 싫었다.
 
남편이 TV를 켰다. 리모컨 버튼을 계속 누르니 뉴스 채널이 나왔다. “뉴스만 보면 열불 터져서 못 보겠어, 영화나 오락 프로나 봐야지.” 남편이 채널을 돌리려는데 승연이 남편이 들고 있는 리모컨을 저지했다. 잠깐만, TV 앞으로 다가갔다. 화면엔 변태섭 우리사회민족연구소장이 기자와 인터뷰하는 장면이 나왔다.
 
우리 사회에서 관용이 사라졌어요. 후보자들의 과거나 캐묻고 과거에 한 말이나 꼬투리 잡는 의식 수준으론 성숙한 민주시민이라 할 수 없지요.” 변태섭의 말투는 늘어졌고 모습은 괴이했다. 머리는 하얗게 새치로 뒤덮였고 비쩍 마른 피부 거죽에 검버섯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다.
 
남편은 그가 역겨웠는지 짜증나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놀고 있네, 니들이 관용을 얘기해? 너희들이야말로 남의 과거 캐묻고 과거 발언 꼬투리 잡는 데 선수들이잖아!” 흥분하는 남편을 향해 승연이 진정하라고 손짓하며 물었다.
 
저 사람 서울대 출신 주사파 변태섭이 맞지?”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골수 빨갱이 새끼! 저 새끼 국회의원 우성철, 송현철, 임정국 이런 놈들하고 어울려 다녔잖아. 우리 회사 근처 술집이 있는데 그 마담이 저것들이 단골이라네. 아주 지저분하게 논다더군. 누구 등골 처먹었는지 돈 씀씀이가 장난 아니라던데. 공짜 좋아하고. 빨갱이 새끼들이 돈, 여자는 엄청나게 밝힌다니까. 자식새끼들 전부 미국 유학 보내고. 좌파해도 좋다 이거야, 지들 공부한 대로, 주장한 논리대로 언행일치하면 누가 뭐라 해?”
 
변태섭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성숙한 민주주의의 완성은 유권자들의 관용입니다. 결국 후보자들의 정책으로 후보자를 판단하지 않으면 진영 간 싸움이 정치의 본질이 되고 말지요. 또 하나 주의할 건, 위선으로 세상을 속이려는 사람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겁니다. 겉과 속을 구분하는 유권자들의 지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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