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파 포퓰리즘’ 선긋기에 나선 아르헨티나 정부의 행보가 주목된다. 하비에르 밀레이 정부 인적자원부는 7일(현지시간) 낸 보도자료에서 “오늘 오후 후안 도밍고 페론 연구소(이하 페론연구소)에 폭력적인 방식으로 침입한 이들이 있었다”며 “유산보호 조처를 통해 다행히 손상·파괴·도난을 예방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얼마 전엔 세계적 팬덤을 지닌 공산혁명가 체 게바라(1928~67) 관련 기념관 예산을 중단한 밀레이정부가 이번엔 자국 역사 최대 신화로 자리잡은 ‘페론주의’에 정면 도전한 모양새다.
이날 정오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 페론연구소에서 해직 직원들과 야당 지지자 등 100여 명이 2023년 대선 예비후보였던 후안 그라보이스와 함께 점거 시위를 벌였다. 밀레이정부가 예산 절감을 내세워 페론연구소를 폐쇄하고 건물을 부동산 업체에 팔기로 한 것에 항의한 움직임이었다고 현지 방송 TV토도노티시아스가 보도했다. 앞서 아르헨티나 당국은 “(페론)연구소의 연간 4억 페소(4억5000만 원) 예산이 대부분 인건비(직원 20명)와 운영비에 쓰인다. 기관의 존재의미에 부합한 어떤 연구활동도 수행한 바 없다”며 폐쇄 당위성을 역설했다. 일종의 ‘세금 도둑’으로 본다는 입장이다.
페론(1895∼1974) 전 대통령(1946∼55년·73∼74년 재임) 이름을 딴 이 연구소는 페론정권 시절 관저로 쓰던 ‘운수에궁(宮)’을 개·보수해 만들어져 2008년 국가유산이 됐다. 페론의 부인인 마리아 에바 페론(1919∼1952)의 드라마틱한 삶과 인기를 상징하는 유적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영부인’, 일명 ‘에비타’(사랑스런 에바)로 더 잘 알려진 에바는 33세 때 자궁암으로 죽기까지 불우한 환경을 딛고 국민 배우로 입신해 24세 연상의 정치인 페론을 만나 아내이자 정치적 동반자가 됐다. 노동자친화적인 복지정책 중심의 페론주의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1952년 에비타의 병사에 사람들은 비탄에 잠겼고 한 달이나 이어진 국장 등 추모 물결이 엄청났다.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에비타(1978년 초연)의 명곡 ‘돈 크라이 포 미 아르젠티나’ 인기가 말하듯 여전한 에비타 신화 속에 이번 밀레이정부의 페론연구소 폐쇄는 매우 획기적인 조치라 할 만하다. 에비타와 그 이름으로 대표된 페론주의 만큼 해석이 엇갈리는 대목도 드물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복지 추구’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와 더불어 ‘경제추락의 원인 제공자’란 오명 또한 따라다닌다.
온갖 역경을 딛고 성공한 국민 스타, 나아가 정치적 존재감 지대한 영부인이 된 에비타를 ‘신데렐라’의 전형으로 꼽기도 하지만, 사후 미이라로 보존돼 얻어진 별명 ‘잠자는 미녀’가 더 문제적이다. 개인 우상화와 그에 따른 아르헨티나의 사회적 병폐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경제 몰락으로 페론 정권이 1955년 9월 무너지고 약 2개월 후 사라진 에비타 미이라는 19년 만에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공동묘지에서 훼손된 채 발견됐다. 1973년 페론의 복권 이후 국립묘지(레콜레타)에 안치됐으나 상반된 시각 속에 ‘평화 없는 무덤’이란 또 다른 별명을 얻었다.
‘에바페론복지재단’(1948~55·일명 에비타재단)이 설립 3년 만에 규모를 100만 배(현 3조 원) 늘린 것도 이 방면의 세계적 기록이다. 복지·자선 활동 목적의 이 방대한 재원은 우선 ‘강제 기부’로 조성됐다. 당시 페론정부는 노동자들의 1년치 봉급에서 이틀치 임금을 무조건 기부하는 법안을 마련했고, 연간 약 1% GDP(국내총생산)를 에비타재단의 운용자금(현 8300억 원)으로 지원했다. 아르헨티나로 망명한 2차대전 나치 전범들의 망명을 묵인한 대가로 거액의 비자금을 수령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바 있으며 에비타 역시 자금 횡령과 사치 의혹에 시달렸다.
1939년 인기 라디오 드라마 ‘역사속 위대한 여인들’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된 게 스무살 에비타에게 인생의 첫 전환점이었다. TV 대중화 이전, 라디오가 최대 대중매체였던 시절 에비타는 여러 라디오 드라마 주연과 DJ를 맡으며 당대 최고 스타로 떠올랐다. 그녀의 외모가 공개되자 호소력 있는 음성에 매료돼 있던 대중이 더욱 열광했다. 라디오 배우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에비타가 1944년 1월 산후안 대지진 때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정부 주최 모금 행사에서 훗날 대통령이자 남편이 된 페론을 만난다.
24세 나이차를 넘어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당대 정치를 넘어 아르헨티나 역사 전체에 강렬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페론이 최저임금제-휴가제 도입-고용 보장-아기날도(연말특별수당) 등 정책을 표방하며 노동계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1946년 52.8%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26세 에비타가 세계 최연소 영부인이 됐다. 페론주의의 근간인 임금인상, 사회보장 강화, 노동자권리 보장을 중시한 정책들은 차베스주의 이름 아래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정부에 의해 현재진행형이다.
페론 집권 이후 경제가 무너지면서 여론이 악화되자 페론정부는 위기 타파를 위해 점차 권위주의적인 행태를 드러냈다. 비판적인 언론을 통제하고 대학생 및 지식인들이 구금됐으며 해직 대학교수가 2000명을 넘었었다. 페론 부부 우상화 작업도 적극 추진됐다. ‘국민 여신’ 에비타의 이미지 메이킹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으며 수십년간 굳건했다. 아르헨티나 국가경쟁력 회복을 위해 에비타 신화의 극복이 필요하다는 게 밀레이정부 들어 비로소 공감대와 추진력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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