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듀프(Dupe)는 ‘복제하다’는 뜻의 ‘duplicate’를 줄인 말로 고가 브랜드의 디자인이나 기능을 비슷하게 모방한 제품을 의미한다.
듀프와 비슷한 부류로 ‘짝퉁(이미테이션)’이 있다. 둘 다 창의성이 결여된 복제품이지만 법적 지위는 완전히 다르다. 짝퉁이 브랜드 로고를 무단으로 도용한 위조품이라면 듀프는 원본의 감성이나 디자인 콘셉트만 차용한 합법적 유사품이다.
노력 없이 남의 작품을 베끼는 것을 잘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부자가 아니라도 품질과 심미성의 가치를 향유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듀프의 가장 큰 장점은 원본에 비해 가격이 저렴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명품을 살 형편이 안 되는 MZ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짝퉁 들고 다니는 것엔 부정적인 MZ들도 듀프에는 반감이 없다. 소셜미디어에 자랑스럽게 구매 샷을 올릴 뿐 아니라 실제로도 열심히 들고 다닌다.
월마트에서 출시한 ‘워킨백’은 듀프의 상징과도 같은 제품이다. 에르메스(Hermès)의 버킨백과 외관도 거의 똑같고 이름도 유사하지만 가격은 100분의 1 수준이다. 버킨백은 최하 9000달러(약 1300만 원)가 넘는 데 반해 워킨백은 78달러(약 11만 원)면 구매할 수 있다.
다이소의 손앤박립밤(3000원)은 샤넬의 립앤치크밤 20분의 1밖에 안 되는 가격에 비슷한 성능을 유지하며, 짐샤크나 할라라의 요가복은 룰루레몬 요가복의 절반 가격에 거의 같은 디자인 향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샤크 에어랩 ‘고데기’도 절반 가격에 70만 원짜리 다이슨 에어랩 효과를 낸다.
“디자인 베낀 것도 도둑질은 도둑질 아니냐”며 듀프가 합법인 것에 의구심을 품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이는 학자가 논문 쓸 때 레퍼런스를 밝힌 후 남의 글을 참고하는 것과 비슷하다. 참조 행위까지 막으면 인류의 문화는 결코 발전할 수 없다.
유행이라는 게 �瀏릿�. 사람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다른 사람을 따라 한다. 인간은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욕망도 있으면서 남을 따라 하고픈 모방 심리도 갖고 있다. 비슷하지만 살짝 튀는 수준에 머물고 싶은 심리랄까.
듀프는 유행 전파 이론 가운데 높은 계층에서 낮은 계층으로 전파된다는 하향 전파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명품이 명품인 것은 단순히 비싸기 때문만은 아니다. 명품에는 브랜드 가치란 게 따라다닌다. 오랜 역사와 전통, 뛰어난 품질과 심미성을 통해 획득되는 브랜드 가치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하지만 결국 돈으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어 비싸게 거래되고 상류층이 그것을 소비한다.
�瀏굘� 문제는 역사와 전통이라는 게 눈에 보이는 가치가 아니라는 것이다. 버킨백으로 유명한 에르메스는 1837년 마구를 만들던 회사에서 출발했다. 브랜드 엠블럼에 마차가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처음에는 가죽 소재의 마구만 만들었지만 해를 거듭하며 일반인이 드는 가방도 만들게 됐고 지갑도 만들게 됐고 슬리퍼도 만들게 됐다. 명품의 지위에 오른 뒤에는 가죽과 아무 상관이 없는 의류와 스카프·액세서리도 만들고 있다.
에르메스는 샤넬·루이뷔통과 함께 3대 명품에 들지만 독보적인 장인 정신과 전통성을 인정받아 최고의 패션 하우스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부분의 브랜드는 유명 백화점에 입점하고 싶어 안달한다. 하지만 에르메스는 거꾸로 백화점 측에서 유치하고 싶어 안달을 한다. 가방을 드는 데 별 쓸모가 없는 ‘전통’ ‘장인 정신’의 가치가 이처럼 위대하다.
�瀏�� 돈 많은 부자라고 해서 다 명품 티가 팍팍나는 버킨백·샤넬백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개중에는 역사와 전통, 디자인과 품질은 놓치지 않으면서 브랜드 로고를 감추거나 일반인은 잘 모르는 브랜드를 찾는 이들도 많다.
브랜드 로고가 강조된 의류나 가방은 속물처럼 보이기 십상이어서 자칫 사람의 값어치까지 떨어뜨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조용한 럭셔리(quiet luxury)의 대표 주자 격으로 이탈리아 브랜드 로로피아나가 있다. 청바지 한 장에 100만 원이 넘고 캐시미어 코트는 800만 원을 호가한다. 이렇게 가격이 비싼 데도 브랜드 로고는 뒷주머니에 코딱지만 하게 수놓아져 있거나 코트 안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다. 로고나 엠블럼이 보란 듯 드러나야 직성이 풀리는 속물들은 억울해서도 못 입는다.
�瀏굘� 로로피아나는 왜 이렇게 쓸데없이 비싼 걸까. 그게 또 이유가 있다. 이 브랜드는 같은 울 소재 원단이라도 흔한 알파카나 라마가 아닌, 사막에 사는 낙타나 고산지대 비쿠냐(vicugna)에서 얻는다.
차별된 제품을 사기 위해 최상류층이 지갑을 열면 상류층을 흉내내기 위해 중산층이 지갑을 연다. 그리고 허영기 있는 사람은 짝퉁을 사고, 실용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듀프를 구매한다. 이런 경로를 통해 결국은 전 세계인이 비슷한 가방을 들게 되는 것이다. 위 아 더 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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