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질서를 교란하고 국제적 합의를 무시하기로 작심한 러시아는 푸틴 집권 5기에도 강도 높은 반미·반서방 공세 외교를 지속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는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를 끝장내고 러시아를 포함한 몇 개의 지역 대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른바 다극화한 세계 질서를 최종 목표로 설정하고 있어 미국의 패권 종식이 뚜렷해지기 전까지는 공세적인 대외 노선을 중단할 생각이 없다.
푸틴 집권 5기 대외정책을 구체적으로 전망하면, 우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의 주된 원인 중 하나로 푸틴이 지목한 나토(NATO)의 동방 확대를 차단하면서 미국과 유럽 국가들 사이를 이간하고, 유럽 내 분열을 획책할 것이다.
러시아가 서쪽 국경에서 나토를 견제하고 유럽과 대치하기 위해서는 동쪽 국경의 안정된 관리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러시아는 중국과의 전략적 연계와 전방위적 협력에 더욱 주력할 것이다. 특히, 서방과의‘문명적’ 단절을 선언한 러시아는 동쪽과 남쪽으로 눈을 돌려 중국, 이란, 북한을 비롯한 유라시아 역내 권위주의 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는 바, 이 지역에 새로운 권위주의 국가 연대가 형성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푸틴 집권 5기의 한반도 정책도 위에서 고찰한 대외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될 것이 예상되므로 북한 체제의 붕괴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180도 달라진 러시아의 대외정책은 반미와 반서구로 수렴되며, 한반도에서 미국과 그 동맹 세력에 맞서 투쟁하는 북한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김정은 체제가 위기를 맞지 않을 만큼의 경제 협력과 원조를 병행하면서 북한이 지정학적 완충지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북한에 대해 그동안 보여 왔던 방관자적 입장을 버리고 적극적 지원자로 나설 수 있으며, 북한 경제가 중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조를 변화시키려 노력할 것이다.
러시아는 한국과 경제협력 복원을 위해 노력하겠지만, 정치·안보협력은 불가할 것이다. 러·우 전쟁 발발 이후 한·러 관계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다. 한국은 국제법 준수와 보편 가치의 입장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고 대러 제재에 동참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한국의 배후에 미국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한국의 주권적 결정을 무시하는 발언을 반복하고 있다. 급기야는 “북한이 자체 핵우산을 갖고 있다”는 푸틴 대통령의 최근 발언에서 보듯이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하는 언사까지 서슴지 않았다.
향후 러시아는 서방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동방전환(Turn to the East)을 통해 새로운 발전의 길을 모색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는 중국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낙후된 극동지역을 개발하기 위해 한국과의 협력이 필요하다. 과거 러시아가 추진하고자 했던 남·북·러 삼각 경협도 한국의 발전 동력을 러시아의 아·태 경제 편입과 극동개발에 활용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러시아는 정치·안보상 인식 차이가 상존함에도 한국과의 경제관계를 복원하고자 노력할 것으로 예상되며, 한국 역시 조건이 갖춰지면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에 나설 것이다.
2024년 6월 19일 푸틴의 방북에 따른 북·러의 밀착화는 지정학적 차원의 사활적 핵심이익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북한의 외교적 고립 탈피와 러시아의 對우크라이나 전쟁지원 확보라는 당면한 상황적 이해타산에 기초한 필요에 따라 추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북·러 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고리로 관계를 강화하고 있으며, 이런 차원에서 푸틴이 방북한 것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북한의 지속적인 협력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소모전 양상으로 끝없이 장기화됨에 따라 재래식 무기와 탄약 수요가 커지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추가 군사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러시아의 현행 정책노선은 과거 한·러 관계가 우호적이었을 때에도 러시아가 견지해 오던 원칙이다. 달라진 부분이라면, 러시아에게 있어서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와 협력국으로서의 중요성이 크게 상승했다는 점과 한·러 간 경제협력 수준이 과거보다 더욱 정치·안보 요인에 제약받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경색 국면이 상당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있다. 통일과 민족을 부정하고 체제 유지를 위해서 핵무기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호언하는 북한이 변화할 가능성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는 한 한·미·일 안보협력은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고, 북한은 한국과 협력국의 대북 억제노력을 빌미 삼아 신냉전 고착화를 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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