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본다. 머리에 핵을 이고 살며 밖으로는 자국 중심주의의 물결이 살벌한 칼춤을 추는 가운데 국가안보와 경제에 집중해야 할 이때 난장판이 된 정치 상황에 모두가 넋을 놓고 있지 않은가.
북한보다도 가난했던 시절을 이기고 전 세계 국력 순위 6위의 부강한 나라를 만든 우리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것일까. 이 혼란이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를 살피다 보면 그 꼭짓점에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좌파 세력의 득세와 한반도와 세계의 안위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고 있는 북한 핵 개발의 출발점이 김대중 정권임을 고발한 전 국정원 직원의 기록… 이 절박한 시점에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편집자 주]
고된 체력 단련에 ‘열외거사’ 등장
전반기 교육에서는 체력 단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전반기 말에 계획되어 있는 공수훈련과 해양 훈련에 대비해 체력을 길러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체력을 기르는 데는 아무래도 구보(驅步)가 최고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는 아침저녁으로 정기적으로 또는 수시로 줄을 맞추어 구보를 했다. 하루에 평균 6~7km는 족히 달린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무릎 관절을 상하는 부상자가 속출했다. 자연히 구보 때마다 부상을 핑계로 열외(列外)하는 친구가 생겨났다. 유독 상습적으로 열외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래서 그 녀석의 별명은 ‘열외거사(列外居士)’가 되었다. 나는 중국말로 그를 ‘리와이(列外)’라고 불렀다. 그는 아마 지금쯤 중국 땅 어느 하늘 아래에서 정보관 노릇을 하고 있을 것이다.
구보에 합기도와 권총 사격까지
구보뿐 아니라 매일 합기도를 한 시간씩 단련했다. 우리는 합기도 교관을 ‘칠룡사부’라고 불렀다. 그분의 성함이 ○칠룡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합기도 실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훤칠한 키에 시원한 발차기와 꺾기가 아주 일품이었다. 칠룡사부가 재미있게 가르쳐 줘서 처음 한동안은 합기도가 교육과정의 활력소가 되었다. 우리는 전반기 교육을 마칠 때쯤에 단체로 심사를 받고 모두 공인 유단자가 되었다. 이를테면 속성으로 단증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권총 사격 훈련도 받았다. 사격장은 양지관 근처 산기슭에 있었다. 사격 교관은 정재○이라는 분이었는데 특등사수 출신인 것 같았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 대통령을 시해한 사건의 여파 때문인지 사격 훈련이 그다지 강조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우리는 공기소총부터 시작해 점차 실탄 권총 사격까지 수십 시간 훈련을 했다.
나는 어찌된 영문인지 권총 사격에 상당한 자질이 있었다. 배운 대로 조준하고 차분하게 격발한 뒤 표적을 확인해 보면 언제나 성적이 그런대로 괜찮게 나왔다. 우리 반에서는 나와 ‘열외거사’의 사격 실력이 가장 나은 편이었다. 우리는 사격 실력을 놓고 조그만 내기를 걸기도 했다.
교육 후 실무에서는 실제로 권총을 잡아 볼 기회가 없었다. 요즘은 사격이 레저 스포츠쯤으로 인식되기 때문인지 내곡동 청사 내의 국가 정보관에 시뮬레이션 사격장이 설치되어 있어 일반 방문객들도 연습 사격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전반기 교육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난 후에는 역사 탐방이라는 명목으로 강화도와 같은 사적지에 가서 바람을 쐬고 오기도 했다. 역사교육을 담당했던 교수는 김창○이라는 분이었는데 그분은 수업 중에 우리에게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해 열변을 토할 때가 많았다.
목욕 외출 시간은 아내와의 꿀 같은 접선 기회
처음 석 달간은 외출도 없는 지루한 훈련병 생활이 이어졌다. 가끔 목욕 외출이라는 구실로 바깥세상에 나오기도 했지만, 이때에도 회사 부근에 잠깐 나갔다 오는 게 고작이었다. 대개 삼삼오오 잠시 나가 맥주나 한잔하고 돌아와야 했다. 나 같이 결혼한 교육생들에게는 이때가 가족과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목욕 외출은 결혼한 교육생들을 배려하기 위해 훈육관이 배려한 제도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짧은 틈을 이용해 아내와 꿀 같은 접선(?) 시간을 가졌다. 입사 바로 직전에 황급히 결혼하느라 제대로 된 신혼생활이 없었기 때문에 이 시간이 더욱더 절실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목욕 시간이 되면 아내에게 전화해서 회사 앞에 대기하도록 했다. 회사 근처에 있는 여관 문을 나서다가 아는 동기 부부들과 서로 멋쩍은 조우를 하기도 했다.

성적은 관심 밖… “봉황은 오동나무 가지가 아니면 앉지 않는다”
나는 별로 좋은 교육생이 못 되었다. 성적은 나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학입시 학력고사를 치르고 나서 ‘다시는 성적을 가지고 남들과 경쟁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더라도 양보하기로 했다. 다른 동기들은 시험을 준비하느라 밤늦게까지 공부하곤 했지만 나는 언제나 태연자약했다.
다들 성적에 신경을 쓰느라 더러 커닝 비슷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백지를 낼지언정 부정행위를 하지 않겠다’며 호기를 부렸다. 나는 친구들에게 ‘봉황은 오동나무 가지가 아니면 앉지 않고 죽실(竹實)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며 혼자 고고한 척 주접을 떨기도 했다.
시험은 대개 주관식으로 출제되었는데, 나는 그야말로 ‘주관적인’ 답안을 냈다. 그런데 가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때도 있었다. 교수님 중에는 틀에 박힌 모범답안보다 나의 ‘독창성’이 듬뿍 반영된 개성 있는 답안지를 더 좋아하는 분도 있었다. 사회와 언론을 가르쳤던 박상○ 교수님이 나의 반골 기질을 높이 사 주었다.
교과목 가운데 영어 성적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새로 배우는 과목들은 성가시기만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일본어가 골칫거리였다. 나는 아예 열등생으로 분류되어 특별관리 대상이 되었다. 가끔 교수님께 불려가 혼나곤 했다. 그래도‘공부해야겠다’는 향학 열의가 별로 생기지 않았다.
공부는 안 해도 운동은 원 없이… 밤마다 웨이트 트레이닝
학교에서는 경쟁 분위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성적 상위자 20명을 뽑아 교육 후에 2주간 미국으로 여행을 보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당근도 나에게는 아무런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다. 모르긴 해도 아마도 나는 성적 하위 20위권에 들었을 것이다.
이 시절 나는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운동은 원 없이 했다. 매일 밤 짬을 내어 혼자서 양지관 지하 체력단련실에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했다. 나의 인생 중에서 이때가 가장 체력이 좋았던 때가 아닌가 싶다. 그땐 나도 근육맨까지는 아니더라도 몸짱 정도는 되었다. 웃통을 벗고 달리기라도 하면 여자 동기들이 “우~!” 하고 야유를 보내곤 했다. 하복 맞추러 갔을 때 재단사 아가씨는“무슨 운동을 하세요?” 하고 물었다.
나는 수업 시간에 노상 졸았다. 정보학을 가르치는 모 교수님은 “우리 동기 중에 수업 시간에 제일 많이 졸던 동기생이 가장 먼저 부서장을 지내고 벌써 퇴사했다”고 하면서 고맙게도 나의 졸음에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교수님들은 우리가 육체적으로 힘들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업 시간에 졸아도 웬만큼은 이해해 주는 분위기였다.
‘양파 허심법’과 ‘마늘 분심법’
우리는 교실 내에서 자리를 번갈아 바꿔 앉았다. 여러 친구와 사귈 수 있도록 한 훈육관의 배려였다. 한번은 이충○과 짝이 되었는데 그는 여러모로 재미있는 친구였다. 외국 제약회사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다가 입사했다는데 순발력과 기지가 있었고 무엇보다 유머가 있어 좋았다.
그 녀석과 이런저런 농담을 하던 중에 “앞으로 어떤 직원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얘기가 나왔다. 그는 “까도 까도 속이 안 보이는 양파 같은 공작원이 되겠다”고 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몇 조각으로 나누어 운용할 수 있는 마늘 같은 정보원이 되겠다”고 했다.
그날부터 우리는 각자 ‘양파 허심법(虛心法)’과 ‘마늘 분심법(分心法)’을 연마하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그는 성공적인 허심법을 단련한 덕분에 지금쯤이면 훌륭한 공작관으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나는 분심법을 연마하던 도중에 ‘노벨평화상’이라는 고비에서 주화입마(走火入魔)에 걸린 꼴이 되고 말았지만.
△김기삼 변호사의 블로그(https://niswhistleblower.tistory.com/)를 방문하면 좀 더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김기삼
△서울대 법대 졸업
△펜 스테이트 디킨슨 법대 비교법학(LLM) 석사 졸업
△국가정보원 8년 근무
△2003년 미국 망명
△2011년 망명 확정
△(현) 미국 뉴욕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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