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이할 정도로 못 생긴 미라보. 그가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합법적인 아내 에밀리와 법적 다툼을 벌일 때였다. 미라보는 아내와 화해하기 위해 존경심을 담은 편지를 써서 1783년 3월20일 법정에서 큰 웅변으로 간청했다. 이는 청중을 크게 매료시켰고 그 덕에 승소했다. 하지만 그의 부인은 즉각 항소했다.
에밀리는 훗날 프랑스 민법 초안을 작성하게 될 장 에티엔 마리 포르탈리스를 변호인으로 내세웠다. 이 변호사는 엑상프로방스 대학에서 미라보와 함께 법학을 공부한 동문으로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를 상대로 미라보는 자신이 직접 변론에 나섰다. 이는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두 주인공 사이의 웅변적인 대결은 애석하게 미라보의 패배로 끝났다. 미라보는 자신을 상대로 훌륭하게 싸웠던 적과 원수가 되지는 않았다. 이 둘은 미라보의 생애가 끝날 때까지 정기적으로 서신을 주고받았다.
결국 아내와 이혼한 미라보는 네덜란드 정치인 윌렘 반 하렌의 사생아인 네라와 그녀의 입양아를 데리고 런던으로 떠났다. 거기서 그는 재정 문제에 관한 여러 논문을 썼다. 2년 후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탈레랑과 콩도르세·브리소와 같은 당대 최고의 권력가들과의 사이에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파리 은행가 그룹과 어울린 미라보는 그들을 대표해 재무장관인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론과 자크 네케르를 상대로 개혁을 주도했다.

야망이 넘치고 성취에 대한 열망이 컸던 미라보는 칼론의 도움으로 프로이센에 대한 비밀 임무를 얻어 마침내 무명 생활에서 벗어나게 됐다. 그는 베를린에서 6개월을 보내면서 암호화된 서신으로 페리고르(Périgord) 수도원장인 탈레랑에게 프로이센 궁정의 음모에 대해 이야기했고, 이를 ‘베를린 궁정의 비밀’이란 책으로 출간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1787년 1월 베를린에서 돌아온 미라보는 칼론이 자신에게 공식 외교관직을 주지 않자 분노한 나머지 새로운 비방 문서를 발표했다. 이로 인해 그는 추방령을 받고 벨기에 리에주로 도망쳐야만 했다.
미라보는 루소를 모델로 삼아 계몽주의를 바탕으로 지적인 발전을 이루고자 했다. 글쓰기에 사로잡힌 그는 전제주의에 관한 에세이를 발표해 왕은 더 이상 지구상의 신의 대표자가 아니라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등 거침없는 아이디어를 쏟아 냈다.
그러는 한편 그는 신문을 출판하기 시작했고 베를린에서 쓴 ‘유대인의 정치개혁에 관한 모세 멘델스존’이란 책을 출판했다. 1788년 4월1일, 그는 자유를 원하는 모든 사람의 권리를 나열한 소책자를 출판했고, 마침내 그의 주요 저작인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 군주제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1788년 8월에는 ‘비세트르(Bicêtre) 감옥에 갇힌 영국인 여행자에 대한 고찰’을 출간해 범죄 수사가 더딘 점을 지적했고, 뒤이어 언론의 자유에 관한 소책자를 발간했다. 그는 주식 거래를 비난한 후에도 재정 캠페인을 계속했다. 같은 해 미라보의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인정했고 부자는 극적으로 화해했다.
1788년 그는 콩도르세·브리소·클라비에르와 함께 백인과 유색인종의 평등·인신매매와 노예제도의 종식을 목표로 하는 ‘흑인 친구들의 모임(Société des amis des Noirs)’을 설립했다. 그다음 해 ‘네케르 보고서’에서 미라보는 그의 사회적·정치적 야망을 드러냈다. 이 텍스트는 그의 정치적 참여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독자와 귀족에게 자신이 훌륭한 정치가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는 자신을 합법화하고 흐름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수단으로 글을 활용했다.
같은 해 루이 16세는 삼부회를 소집했다. 1614년 이래 한 번도 소집되지 않았던 이 세 조직(성직자·귀족·제3 신분)의 모임은 국가가 겪고 있는 금융 위기와 불황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강등된 귀족인 미라보는 제3 신분을 대신해 프로방스에 모습을 드러냈고 1789년 4월 급기야 엑스(Aix)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마흔의 미라보는 혁명의 아버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이곳에는 쿠르 미라보(Cours Mirabeau·미라보 광장)라는 명소가 있다. 길이 440m·폭 42m의 이 광장은 엑스의 가장 인기 있고 활기찬 장소 중 하나다. 이곳에는 카페가 즐비하며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레 되 가르송(Les Deux Garçons·두 녀석)’으로 폴 세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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