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은 혼노지에 있다.” 이 말은 일본 역사의 기점이 된 전국시대 말 전국 영주이자 천하통일을 앞두고 혼노지에서 소수의 경호원들과 머무르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를 기습 살해한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가 부하들에게 한 말이다.
미츠히데는 모시던 영주를 떠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지성과 실력으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발탁되어 대영주가 된 인물이다. 이것은 로마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암살과 함께 동서고금의 대표적 역모 사례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카이사르는 진정한 귀족주의와 관용주의의 모델이다. 그는 카르타고와의 전쟁 이후 거듭된 내전으로 혼미해진 로마의 공화정을 재건한 인물이다. 그는 이를 위해 루비콘 도하와 12년에 걸친 원정 전쟁을 치렀다. 또한 군사 지도자 마리우스와 술라가 쿠데타 후 살생부를 통한 공개 숙청을 요구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관용을 베풀며 경호팀을 해체했다. 하지만 역사는 그의 관용이 감사보다 적개심을 초래했음을 보여 준다. 아꼈던 부하들과 용서했던 적들이 경호관 없이 등장한 카이사르를 난도질하고 달아났던 것이다.
카이사르의 역설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적용된다. 자신의 고향 친구이자 군 동료였고 중앙정보부장을 맡긴 김재규의 배신에 목숨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재규의 반역은 암살 1년 전부터 준비됐다. 첫 기점은 자신과 가까운 정승화의 육군 참모총장 임명을 위한 대통령 독대였다.
박정희는 결국 자신이 육참총장으로 생각해 온 인물 대신 정승화를 임명했다. 친구에 대한 배려 때문이었다. 이후 정 총장은 군단장·특전사령관·수도경비사령관 등에 자신의 인맥을 임명하여 군맥을 구축한다.
10.26의 현장이 된 삼청동 안가(안전가옥)는 청와대와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공동구역이자 중정이 1차 관할하는 곳이다. 10.26 당시 육참총장은 대통령과 경호실 몰래 그곳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것은 육참총장이 위수령을 위배한 것이며, 군사 반란의 의도가 담긴 행동이기도 했다.
10.26 사태 때 보여 준 내각과 보안사령관의 일관성과 민첩성은 박 대통령의 카리스마가 국가 위기 순간에 빛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총리와 장관들은 줄기차게 박 대통령의 유고 경위를 추궁했고, 반란 수괴 김재규의 계획에 제동을 걸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군 정보기관인 보안사령부는 김재규의 암살 행위를 확인하고 제압하여 반란 수괴를 신속히 체포하는 쾌거를 이뤘다.
정승화에 대한 심판은 어려웠다. 심지어 10.26 직후 정승화에 대한 의혹을 지속적으로 제기해 온 국방장관마저 정승화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자 말을 바꾼다. 군 내부에서도 반역과 간접적으로 관련된 계엄사령관의 미묘한 혐의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다.
12.12는 국군의 역사뿐 아니라 한국사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보안사령관이자 합동수사본부장이던 전두환 장군을 위시하여 신군부로 지칭되는 정규 육사(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앞장섰다. 군의 선배들도 동참한 미완의 궁정 쿠데타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한편으로 군사혁명은 1차적으로는 군에 의한 혁명, 2차적으로는 군 정보기관에 의한 혁명이란 패턴도 자주 목격된다.
12.12 이후 과도정부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사이 박 대통령 사후의 권력 공백을 틈타 북한이 대남 공작을 펼치며 여적 세력이 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5.16 당시 수도원으로 긴급 피난했던 장면 총리를 연상시키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광주사태가 발생한다. 이것은 1960년대 무력 도발에서 1970년대와 유신체제에 발맞추어 민중 운동과 지역화에 전념해 온 북한 대남 기구로선 크나 큰 기회였기 때문이다. 당시 김대중은 비자금 등 북한과 결탁하여 1970년초 대선에서 이미 향토예비군제 폐지·4대국 보장론 등 좌파적 공약으로 국가안보와 정책 기조를 흔든 바 있다. ‘서울의 봄’은 김대중과 북한 김일성의 공조로 진전되기 시작했다.
광주사태는 세계 공작사의 전설이 되었다. 무엇보다 전선과 멀리 떨어진 대도시에 600여 명의 북한특수군이 투입돼 작전을 펼쳤을 뿐 아니라 내부 협조자들과 합세하여 코뮨을 만든 것이다. 선전·선동을 성공시키고, 수많은 예비군 무기고와 군납용 자동차 공장을 급습하여 무장하고, 군경을 무력화하고, 도청을 접수하고, 갑첩들이 다수 수감돼 있는 광주교도소를 무력 기습한 그들의 행적은 한편의 성공 신화를 만들었으나 교도소 기습 실패로 주력을 잃게 된다.
이후 상황이 전두환 대통령의 집권으로 이어지자 민주화의 망령이 유령처럼 떠돌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의 유지를 존중한 신군부는 유능한 참모진을 등용해 일관된 경제 정책을 펼치며 과학·정보통신(IT)·대기업의 국제화 등으로 국가 경영의 신기원을 이루었으나 존중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한일국교정상화·월남전 참전·경부고속도로 건설 등에 반대를 위한 반대로 임했던 야당과 재야 세력에게 자율보다 질서가 앞서며, 권리보다 책임을 우선시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대원칙을 제시하는 지적 기반조차 없었다.
불행한 것은 1970년대 미국의 명문 대학과 지성도 한국의 전략적 위상, 나아가 독재와 경제발전이 결합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훗날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리콴유 싱가포르 수상의 사례가 드러나자 한국의 군사정부에 대한 재인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좋은 예로 마케팅계의 구루인 필립 코틀러 교수가 ‘국가마케팅’에서 1980년대 성공과 실패 사례로 한국과 브라질을 들었다. 또한 5공화국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국제경영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필자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역사를 바꾼 배신이나 암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위대한 지도자였으나 사후 국립현충원뿐 아니라 자신이 바란 곳에도 묻히지 못하고 있는 딱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예우 문제를 거론하고 싶은 것이다. 한국이 반지성과 저질성으로 치닫는 것은 종북주사파의 역사와 영웅에 대한 지독한 폄하 때문이다.
월남전 참전용사이자 석학인 80대 노령 지만원 박사가 보수정권하에서도 사면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국군이자 전관에 대한 기본 예우도 잊은 것이다. 역사와 영웅에 관심 있는 필자는 우리의 적은 내부에 있고, 그 적은 바로 우리의 무지성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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