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8·15광복 이후 정부 수립, 6·25전쟁과 빛나는 산업화 시기를 거쳐 대한민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격동의 한반도, 美CIA 요원으로 그 한복판에서 활약한 마이클 이 박사의 숨 막히는 체험…. 북한 정권의 실체와 광주5·18 등 좌경 친북세력이 주도한 사건들에 관한 증언과 분석,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그의 이야기들이 값지다. 이에 美연방정부 공무원으로 살아온 40년 세월을 담은 그의 저서 ‘CIA와 대한민국’을 지면에 연재한다.
끈질긴 암살 시도
김정남 암살 시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2004년 12월에 김정남이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이종사촌 누이 김옥순의 집에 체류하고 있을 때 죽은 고용희의 측근, 즉 김정은 옹립 세력이 김정남을 암살하려는 공작을 펴고 있는 것을 오스트리아 정보당국이 탐지하고 외교 채널을 통해 북한에 강력히 항의한 일이 있었다. (전직 북한 외교관 고영환 씨의 증언이다).
또 2009년 4월에는 평양 중구역에 있는 특각 ‘우암각’ 기습 사건이 있었다. 이곳은 전에 신상옥과 최은희가 한때 거처로 사용하기도 한 곳인데 김일성 사망 후 1997년부터 주로 김정남이 사용했다. 김정남은 해외에서 돌아오면 주로 이곳에 머물렀고 그의 측근이 모여서 이따금 파티도 열곤 했다.
그런데 2009년 4월 초에 김정남의 측근들이 이곳에서 연회를 갖고 있는데 무장한 국가안전보위부 요원들이 기습해 김정남을 사살하려고 한 사건이 있었다. 마침 그가 그 자리에 없어서 변을 모면했지만 나머지 주요인물은 모두 체포되었다. 이 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김정남은 서둘러 싱가포르로 도주했는데 그 후속 조치로 그해에 평양에서는 국가보위부를 장악한 김정은의 지시로 김정남의 측근이 대거 체포되었다.
2010년 6월 하순, 북한 국가보위부는 중국에 잠입해 활동 중인 공작원 김영수에게 김정남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는 그해 9월경 김정남이 베이징에 나타나면 교통사고를 위장해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현지 택시기사를 매수해 대기하고 있었으나 김정남이 나타나지 않아 계획이 무산되었다. 이 사실은 2012년 9월12일에 위장 탈북인으로 국내에 잠입했던 김영수가 체포되어 2013년 2월 초에 서울구치소에서 월간조선 기자에게 실토한 사실이다.
충격적인 사건
2011년에는 김정남이 마카오에 머물고 있을 때 북한 국가보위부 요원들이 나타나 김정남의 경호원들과 총격전을 벌였으나 다행히 김정남은 다치지 않고 도피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중국의 언론 매체가 공식 발표한 것이다. 그러다가 참으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2011년 12월17일(사실은 16일) 김정일이 사망하고, 어린 김정은의 후견인으로서 실질적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고모부 장성택이 김일성 일가를 위한 수령경제를 내각 중심의 민생경제로 전환하려는 경제개혁을 시도한다. 그러나 그는 그의 39호실 비자금 관리에 관한 기득권을 시기하고 그의 체제 변조 계획에 반대하는 수령 절대주의 세력의 반격을 받고 2013년 12월12일에 처참하게 처형당하는데, 여기에는 사실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숨은 이유가 있었다.


후계자를 위한 배려
김정일은 2008년 7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에 권력 승계 문제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1987년부터 2010년까지 장장 23년간 스위스 은행에 은닉된 39호실 비자금을 관리해 온 베른 주재 이철(본명 이수용) 대사를 2010년에 평양에 불러들여 계좌 내용을 아들 김정은에게 인계해 주었다.
그 후 김정일은 아들 김정은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선군정치를 넘어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주체 철강·주체 섬유·희천 수력발전소 건설이라는 3대 국책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체 철강 생산과 이승기 박사가 시작한 비날론 화학섬유 생산은 원자재 부족과 기술 결함으로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자 김정일은 희천 수력발전소 건설에 목숨을 걸었다. 그러면서 그는 후계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수력발전소 건설의 총책임과 감독을 김정은에게 맡겼다. 그런데 희천 수력발전소 건설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이 김정일을 사망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희천 수력발전소
자강도의 희천 수력발전소 건설은 2001년에 착공했지만 자재와 전력 부족으로 9년간이나 방치되어 있었다. 2009년에 김정일이 현지 시찰 후 공사를 재개해 3년 내에 완공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군인· 공장노동자·학생을 총동원해 삽과 괭이로 필사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원래 10년은 걸릴 공사인데 3년 내에 끝내라니 중장비도 하나 없이 필연적으로 부실공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김정일은 하부에서 올라오는 보고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주 현장을 방문해 이 공사가 끝나면 평양과 주변 산업시설에 충분한 전력 공급이 가능하다고 크게 선전했다.
2011년 12월16일, 김정일은 함경남도 현지 시찰 계획을 취소하고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과로에 시달리는 그가 그날은 유난히 혈압이 불안정해 주치의가 여행을 만류한 것이다. 그런데 그날 오후 5시경 아들 김정은에게서 전화를 받고 김정일은 무슨 이유에선지 노발대발하고는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졌다. 그는 즉시 비서에게 외출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고는 경호원과 비서와 당번 주치의를 대동하고 평양 중부에 있는 딸 김설송의 집으로 떠났다.
그 무렵 김정일은 무슨 일이 있으면 딸과 상의하려고 김설송의 집을 자주 방문했다. 그곳에 6시쯤 도착한 후에 부녀간에 무슨 대화가 있었는지 모르나 심각한 대화를 나눈 다음 김정일은 마음의 평정을 얻은 듯 즐겁게 포도주를 마셨다. 그리고 7시 무렵 피곤하다면서 침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밤 8시30분경에 침실에서 초인종이 울려 딸 설송과 그녀의 아들·주치의가 뛰어 들어가 보니 김정일이 입에 거품을 물고 졸도해 있었다. 주치의가 최선을 다해 회생요법을 실시했지만 김정일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2011년 12월16일 밤 11시
그들은 급히 김정일을 차에 싣고 평양 동쪽 강동군에 있는 32호 특각으로 이동했다. 김일성 일가가 사용하는 모든 특각에는 최고 수준의 의료시설이 구비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2011년 12월16일 밤 11시에 숨을 거두었다.
그가 사망한 지 3년이 지난 후에 측근들의 증언에 의해 새로운 사실들이 공개되기 시작했다. 측근들의 말에 의하면 김정일은 평소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처럼,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처럼 비참한 종말을 맞을 수도 있다”는 말을 되뇌며 염려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비참한 종말을 맞기 전에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임종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김정일이 2011년 12월16일 밤, 딸 김설송의 집에서 술을 마신 후에 쓰러진 사실을 감추고 2011년 12월17일 아침 8시30분에 현지 시찰을 가는 기차 안에서 과로 누적으로 심근경색과 심장마비가 와서 세상을 떴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 정보당국에선 17일 아침에 김정일의 특별 열차가 평양을 떠난 일이 없었다는 걸 인공위성 사진을 통해 확인했다.
전직 호위총국 간부들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은 죽기 전에 상당 기간 정서불안 상태에 있었으며 음주 빈도가 늘었다고 한다. 2008년에 뇌졸중을 겪은 후 평소에 신부전증으로 투석을 하고 있었으며 몇 가지 약을 먹고 있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김정일의 사망 원인을 세 가지로 봤다. 첫째는 과로, 그리고 그날 먹어야 하는 약을 먹지 않은 상태에서 포도주를 과음한 것, 그리고 결정적인 원인은 아들 김정은에게서 걸려 온 전화로 심한 심적 충격을 받고 순간적으로 혈압이 급상승한 것이었다.
정리= 박혜수 편집위원
프로필
△ 美 연방정부 40년 근속
(DIA(Defense Intelligence Agency·국방정보국) 16년·CIA(중앙정보국) 24년)
△ 1976년 미국 외무고시 합격
△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정치학 박사
△ 美 국무성 동아시아 문제 수석연구원
△ 美 국무성 외교연수원 교수
△ 주한 미국대사관 정무관
△ CIA 한·미 안보협력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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