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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언의 문화방담] 한지의 나라, 한지 작가 함섭의 위상
한지의 멋과 심미적 가능성을 넓힌 한지 예술 프론티어
조용한 관조적 미감에 머문 한지 예술을 힘과 호연지기 예술로 승화
말기 간암을 이겨 내고 기적적으로 돌아와 한지에 영혼 쏟아부어
이재언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8-18 06:31:20
 
▲ 이재언 미술평론가
종이의 발명자가 중국 후한시대 채륜(蔡倫)으로 알려져 있지만인류는 이전부터도 종이를 만들어 썼던 것 같다이집트의 파피루스를 초보적인 종이로 볼 수도 있으며우리 경우에도 아주 오래 전부터 독자적인 종이 기술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신라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白紙墨書大方廣佛花嚴經국보 196리움미술관같은 고문서나 현존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 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등이 8세기의 것으로, 그 이전에도 종이의 사용은 있었을 것이 확실하다.
 
종이 삼국지라고 부를 만한 종이 논쟁이 한동안 일었다한국의 한지(韓紙)·중국의 선지(宣紙)·일본의 화지(和紙)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재료나 조직·내구성 등에서 한지의 승리로 종결되었다유럽에서도 기록유산 복원에 주로 일본의 화지를 사용하다가 루브르를 필두로 한지로 바꾸고 있다는 소식들이 들어오고 있다.
 
종이에서 태어나 종이에서 죽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태어나면 종이 꼬아 만든 금줄이 걸리고, 죽으면 종이 수의를 입힌다. 무명·삼베 수의(壽衣)만 알지만 한지장(韓紙匠)들은 종이로 수의를 지었다. 집의 바닥과 , 창문도 종이고, ·모자·허리띠·신발 심지어 물통까지 종이로 만든다. ‘종이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 루브르가 우리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김성중, 2021. 6. 26. 조선일보) 우리는 잘 몰랐지만 우리 조상들의 삶이 종이라는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현대미술에선 안료 대신 종이로 작업하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 종이의 나라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종이의 나라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작가가 있다. 바로 함섭(1942)이다.
 
▲ 말기암을 이겨 내고 작업을 재개한 함섭 작가의 모습.
  
함섭 작가가 간암을 기적적으로 이겨 내고 작업을 재개했다는 소식을 듣기만 했다. 80년대부터 종이를 가지고 작업하기를 40년이 넘었다. 주지하듯이 현대미술이 많은 것, 특히 우리의 것들을 곡해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주류·중심·앞장은 언제나 서구였고, 우리의 것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게 일상이었다. 작가도 70년대까지는 오일이나 아크릴 회화를 중심으로 작업을 했었다. 그러다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거듭하면서 한지를 만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가 한지라는 환경에 살아왔다는 것 말고도, 한지의 다양한 물성과 심미성이 안료 표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인식이 어느 순간 확신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작가는 80년대 초부터 한지의 다양한 물성을 회화적으로 구현하면서 우리가 소홀히 했던 우리다움의 모티브들을 폭넓게 탐구하는 데 매진했다작가의 한지 작업 전체를 주제별로 보면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기는 80년대부터 1994년까지로 신명·enthusiasm, 2기는 1995년부터 2012년까지로서 한낮의 꿈·daydream, 3기는 춘천 정착 이후 2013년부터 현재까지로 고향·one’s home town이다.
 
▲ 신명·Enthusiasm 84111, 30x50cm, 한지, 1984.
 
1기 작업의 특징은 투박하면서도 강렬한 힘과 깊이가 충만한 역동적 화면을 선보인 것이다특히 오방색과 힘찬 먹선 획과의 대비닥나무의 거친 섬유 텍스처와 부드러운 한지의 대비드문드문 등장했다 사라지는 서책 문자 텍스트 이미지 등이 동시대 한지 작가들의 것과는 양식적으로 차별화되었다대체로 창호에 옅게 드리우는 감각적이고 문인화적 감상 같은 것에 몰입해 있는 정적인 분위기가 한지 작업의 전형처럼 고착화되어 있는 데서 가감하게 벗어난 것이다단색조의 정적이고 감상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우리다움이란 역시 다소 투박하지만 흥과 진취적인 기운을 화면에 담아냈을 때 구현되는 것이라 본 것이다.
 
▲ 신명·Enthusiasm 9210, 164x347cm, 한지, 1992.
  
내 작업에서 일련의 색과 면·선들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은 고향의 풍요다. 각 방위의 상징이자 수호의 표시인 오방색은 작품의 필수 요소다. 내 삶과 작품은 한결같이 한국적 정신에 입각한 것으로, 흥에 겨워 던지고 찢고 두드리는 행위 자체도, 한지라는 재료도 그렇다. 우리의 정체성과 그 심층구조를 논할 때 오색이 나부끼는 서낭당의 분위기, 사찰이나 궁궐의 원색 단청, 색동저고리, 치마를 입고 하늘을 날며 그네 타는 모습, 널뛰는 모습, 떡판의 오묘한 문양 등에서 모티브를 찾았다.”(작가 노트)
 
▲ 한낮의 꿈·Day Dream 12071, 62x74cm, 한지, 2012.
 
90년대 즉 2기는 작가의 전성기가 열리는 때이다. 1기에는 우리가 강박관념처럼 항상 따라다녔다면, 2기에는 그러한 이데올로기화된 데서 벗어나 우리를 보다 넓은 지평과 미래 시제에 던져 놓고 보는궤도 수정을 하고 있는 느낌이 짙다하지만 이는 작가 태도의 문제일 뿐 작품상 일관된 어떤 양식의 문제나 차원은 아닌 것 같다어떤 경우는 전에 없이 강렬한 오방색이 나타나기도 하고어떤 경우는 닥 특유의 갈색톤이 짙게 덮고 있는 등 다양하다특히 2012년에는 어떤 인물 이미지 전사가 삽입되는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다필자는 한지 텍스처와 재현적 이미지의 매치가 대단히 신선하여 더 많은 작품들을 기대했지만두 점을 끝으로 더 보여 주지 않고 있다다분히 팝의 터치가 삽입되어 획기적 반전을 노린다 싶었는데필자에게는 아쉬운 대목이다.
 
 
▲ 한낮의 꿈·Day Dream 98169, 95x163cm, 한지, 1998.
 
2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90년대부터 작가의 진가가 인정되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국내가 아닌 국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바젤아트를 필두로 나가는 아트페어에서마다 매진을 기록했으며, 해외 유수의 갤러리들에서 초청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서구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한지작업인데다, 우리 민족 고유의 흥과 미감, 관객들로 하여금 내면 깊숙이 잠재된 에너지들을 토로하도록 하는 기운 생동의 한마당이라는 점에서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말기 간암 치료를 위해 고가의 신약을 투약하는 데 엄청난 돈이 들어가고 있었지만 해외 화랑들이 계속해서 작품을 구입해 준 덕분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 고향·ones home town 1524, 195x162cm, 한지와 혼합재료, 2015.
 
작가는 좀 더 넓은 공간에서 안정적으로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2009년부터 준비해서 고향 춘천으로 거점을 옮겼다바로 고향·one’s home town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마치 도연명의 귀거래사 낭송이 들리듯밝고 경쾌한 화면이 두드러진다더러는 초가삼간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들이나 격자의 창호가 해체되어 안과 박의 경계까지 허무는 자유로움을 구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예나 지금이나 일필휘지의 호방한 묵선은 더욱 리드미컬해졌으며유연하고도 감각적인 기하적 면 구성·강한 대비·탄탄한 구성 등에서 굳이 오방색이 아니어도 신명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고향·ones home town 2304, 97X131cm, 한지와 혼합재료, 2023.
 
▲ 고향·ones hometown 2302, 97X130cm, 한지와 혼합재료, 2023.
 
작가의 작업 원칙에 대해 귀담아 들을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다작이다. 작가의 작업이 보통의 페인팅과는 달리 공정이 복잡하다 보니 다작이 쉽지 않음에도  작업량이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많다. 이 점을 필자도 긍정적으로 본다. 작가는 일단 작업량이 많아야 한다. 취사선택의 여지가 넓을수록 작가의 퀄리티 자체가 높아진다. 작품의 판단은 관객이나 애호가들의 몫으로 남기고 작가는 전력투구를 할 뿐이다. 요즘 세상엔 작가가 참 많다. 하지만 작가다운 작가를 만나기가 그리 쉽지 않다. 어떤 이는 팔리지 않으니 많이 그리기가 두렵다고 말하기도 한다. 글쎄, 그릇의 차이일지는 몰라도 모름지기 작가라면 힘들어도 그리고 싶을 때 그리는 게 작가지, 팔릴 만큼만 그린다면 작가라는 명예를 내려놓아야 한다. 아무쪼록 병상에서 일어나 작업을 재개한 다음의 전시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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