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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민의 개인주의 시선
안전에 대한 철학적 원칙 정립 필요하다
자동차 주행권과 보행자 보행권에 가치 전도된 사고 패턴
개인과 개인·사회와 개인 간 관계 설정 고민 우선돼야
배민 필진페이지 + 입력 2023-04-14 10:59:22
  
▲ 배민 숭의여고 역사교사·치과의사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 건물은 8층이긴 하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옥상을 개방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지금껏 10년 넘게 근무해 왔지만 한 번도 옥상에 올라가 본 적이 없다. 사실 한국에선 아파트에서도 베란다에 유리창이 설치되는 경우가 많아져서 이제 유리창 없이 베란다에 기대어 바깥 풍경을 바라보는 건 매우 드문 일이 되어 버렸다. 어렸을 때까지만 해도 난간에 팔을 걸치고 하늘을 바라보거나 먼 풍경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생각해 보면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그런 자세로 풍경을 보는 행동 자체가 일상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춰 온 셈이다.
 
내가 역사교사라서 유독 그런 현대 한국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이 한국 사회가 변화해 온 하나의 방향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터인가 지하철 역 플랫폼마다 들어선 차단벽, 그리고 지난 3년간 코로나19 방역지침 등에서도 그러한 방향성은 잘 드러난다. 즉, 옥상에 올라갈 수 없는  나라, 격벽으로 차단되어 가는 나라, 마스크를 벗지 못하는 나라로 변화해 온 것이다.
 
그렇다면 안전에 그토록 열광해 온 이 사회의 구성원들은 정말 안전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지난달 인터넷 뉴스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보았다. 흥미로웠던 것은 사실  기사 자체보다는 그 기사에 달린 댓글들이 안전에 대해 한국 사회가 가진 모순을 잘 드러내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해당 기사는 “무단횡단 하던 여고생 차로 치고 떠난 40대 초등학교 여교사”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처음에는 그저 여고 교사로 근무하는 입장에서 제목에 낚여 기사에 눈길이 간 것이지만, 막상 읽어 보니 그 기사의 댓글들은 압도적으로 무단횡단을 한 사람이 잘못이라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 중의 한 댓글은 꽤 점잖게 나름 훈계조의 도덕적 분위기까지 풍기며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었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안전교육 할 시간이 없나? 도로와 차들이 많은 세상에. 당연히 가르쳐야 할 것이 많다. 선생들은 제대로 가르치고 있나? 국회의원 놈들은 교통사고의 책임을 운전자 중심으로 돌리는 게 잘못이다.”
 
하지만 애초에 도로 교통법의 존재 이유는 자동차가 도로를 질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시내에서 도로를 주행하는 자동차들이 마치 도시 간 고속도로를 운전하듯 질주하는 모습을 일상적으로 마주하며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망각하고 있을지 몰라도, 횡단보도나 신호등의 존재 목적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에 있다. 민법의 본질은 개인 간 권리의 우선순위를 확립하는 것이다. 보행자가 보행할 권리와 자동차가 주행할 권리, 둘 중에서 본질적으로 우선해야 하는 가치는 후자가 아닌 전자다.
 
한국 사회에서 자동차의 주행권과 보행자의 보행권에 대해 이렇듯 가치가 전도된 사고 패턴을 보이는 이유는 안전에 대한 철학적 원칙 자체가 부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가치를 지배하는 기준이 한국 사회에서는 다수의 감정, 즉 철학과 상관없는 말초적인 감정일지도 모른다. 편하게, 쾌적하게, 걸리적거리는 것 없이 질주하듯 살고 싶은 말초적인 감정. 그 결과 도로와 보도 사이에 펜스도 점점 더 많이 설치되고 있다. 옥상 진입 금지·지하철 차단벽·코로나19 마스크 등, 보행자 개인들은 점점 행동의 자유를 통제받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사회적으로 팽배한 인식, 즉 개인주의 개념의 부재 그리고 개인의 권리에 대한 오도된 인식을 보여 준다.
 
한국 사회는 진정으로 인간 ‘개인의 안전’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말초적인 감정에 지배되면서도 안전을 집단적으로 쉽게 담보할 수 있는 보다 즉각적이고 근시안적인 수단, 즉 개인의 행동에 대한 ‘통제’라는 선택지를 지금껏 사회적으로 쉽게 사용해 왔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작년 이태원 참사 때는 예전 2014년의 세월호 사건에서처럼 많은 사람들이 ‘정부는, 국가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질문했다. 하지만 지금껏 시스템을 제대로 관리해 오지 않고 매뉴얼을 제대로 만들고 지키지 않아 온 것, 즉 근시안적 편리함에 이끌려 편하게 살아온 것은 특정 정권과 상관없이 늘 그래 왔던 한국 사회의 관행이었을 뿐이다. 만약 사고에 대한 초동 대처가 미흡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담당자가 처벌을 받는 것으로 비난 게임(blame game)을 그쳤어야 한다. 물론 브레이크가 고장 난 한국 사회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사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통제를 늘려 온 것과 국가의 책임을 강조하는 흐름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지금껏 ‘나는 소중하니까’와 같은 자기중심주의를 바탕에 깔고, 편안하게 살고 싶은 대로 살면서 동시에 집단의 생명과 안전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우리들’의 권리만 주장될 뿐이었다. 여기에 개인 간 권리의 우선순위 그리고 사회와 개인 간의 관계 설정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그 결과 (‘소중한 나 자신’이 아닌)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발전하기는커녕 필자의 어린 시절과 비교해서 오히려 퇴보해 왔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 개인이 자신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책임을 국가에 전가하고자 한다면 그 비용 역시 개인이 부담할 수밖에 없다. 그 비용으로 지불해야 할 것이 자유롭게 숨 쉴 자유든, 원하지 않는 백신 접종과 건강검진에 대한 거부이든, 심지어 옥상에서 먼 풍경을 바라보며 낭만과 휴식을 즐길 권리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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