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6·25전쟁 75주년이 되는 날이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발발한 전쟁이 6·25다. 북한 김일성이 기획, 소련의 스탈린이 승인·감독, 중공의 마오쩌둥(毛澤東)이 지원한 전쟁이다.
한국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 공산화 직전에 기사회생한 것은 미국과 유엔군의 신속한 참전과 지원 때문이었다.
1950년 9월15일 유엔군과 국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고 9월28일 서울이 수복됐다. 유엔군과 국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 중국 국경까지 올라가 북한은 패망 직전에 처했다. 다급해진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파병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중공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참전 요청에 부정적이었다. 1950년 10월1일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해 파병을 주장했지만 고위 당간부들은 반대했다. 그러나 10월8일 마오쩌둥은 당 중앙위원회를 소집해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도와 가정과 나라를 지킨다)는 기치하에 참전을 결정했다.
10월19일 중공은 1차로 북한에 4개 군단, 지상군 26만여 명을 파병했다. 이후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까지 총 다섯 차례의 대공세를 단행했다. 당시 북한에 파병된 중공군은 총 17개 군단으로 120만 명이었다.
마오쩌둥이 참전을 전격 결정한 배경 중 하나는 스탈린으로부터 넘겨받은 미국 행정부의 한국전쟁에 관한 기밀문서 때문이었다. 그 내용은 “트루먼 행정부가 한국전쟁을 만주 지역으로 확전시키지 않고 한반도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작전을 전개할 것이다. 중국이 유엔군이나 국군을 공격해도 중공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이 사실을 중공에 전달하며 참전을 재촉했다.
소련은 이 정보를 어떻게 확보했을까. 1930년대 영국 지성을 대표하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생 40여 명이 소련 스파이가 되었다. 당시 자본주의·파시즘 등에 환멸을 느낀 학생들이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소련이 주도하는 국제공산당 조직 코민테른에 가입했다. 이들은 조국인 영국을 배반하고 소련의 간첩 활동을 하는 것이 세계 혁명을 위한 정의라고 여겼다. 그 대표적인 게 ‘케임브리지 5인방’이다. (2024년 4월30일 본지에 연재된 필자의 스파이 세계 제17회 ‘英 첩보사상 최악의 반역자 MI6 고위 간부 킴 필비’ 참조)

영국 외교관 신분으로 소련 간첩활동을 하며 한국전 관련 정보를 넘겨 중공 파병에 결정적 역할을 한 도널드 맥클린도 ‘케임브리지 5인방’ 멤버였다.
1913년 런던에서 태어난 맥클린은 영국 국회의원과 야당 지도자의 아들이었다. 1931년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한 그는 공산주의에 심취, 졸업하던 1934년 소련 정보기관 NKVD(내무인민위·KGB의 전신)의 스파이로 인입되었다.
맥클린은 1935년 영국 외무부에 채용돼 네덜란드·스페인·파리 등에서 근무하며 소련에 각종 정보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1944년부터 1948년까지 워싱턴에 근무하면서 제1서기관으로 승진한 그는 영국 및 미국의 대소(對蘇) 간첩 활동, 원자폭탄 생산 계획, 중국과 북한의 군사정보 등 최고 수준의 정보를 소련에 전달했다.
1950년 런던으로 돌아와 외무부의 미국 담당국장으로 임명되면서 미국에서 제공받은 한국전쟁 관련 주요 정보를 소련에 넘겼다. 이후 미 중앙정보국(CIA)의 소련 통신암호 해독 프로젝트인 ‘베노나 작전’에 의해 맥클린이 소련 스파이로 지목됐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1953년 소련으로 도망쳤다. 이후 모스크바 생활에 적응해 박사 학위를 받고, 소련과학아카데미 산하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며 국제관계학을 가르쳤다. 1983년 70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1990년대에 기밀 해제된 한국전쟁 관련 중국 및 소련 자료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전쟁이 끝난 후 참전을 후회했으며 “조선 전쟁은 근본적으로 잘못됐다. 스탈린이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중공군은 무려 40만860명이 전사, 2만1000여 명이 포로가 됐다. 이밖에 민간인 신분으로 동원된 비전투원 노무자 약 77만 명이 전사했다. 소련이 제공한 정보를 믿고 참전해 큰 피해를 입었다는 넋두리이다.
마오쩌둥의 측근 린바오(林彪)도 소련이 미국이 반격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장담하지 않았다면 파병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전쟁 시 중공군의 참전을 연구한 국내 학술자료 어디에도 이런 사실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6·25 전쟁 75주년을 맞아 관련 연구를 전면 보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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