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5일간 내전을 방불케하던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사태가 진정 국면을 맞으면서 관점을 둘러싼 공방이 오히려 가열되는 모양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에선 이번 일을 “외국의 침공” “폭동”으로 규정한 가운데, 법 집행 방해 시 누구라도 처벌 대상이라고 한 톰 호먼 이민세관단속국(ICE) 수장의 발언 관련해 트럼프는 “(내가 호먼이라면) 그(개빈 뉴섬 캘로포니아 주지사)를 체포하겠다”고 답한 바 있다.
한편 뉴섬이 LA에 대한 연방 정부의 군배치를 막아달라며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법원에 긴급 가처분 신청을 냈지만 ‘일단 거부’됐다. 10일자 뉴섬 지사의 엑스엔 “방금 트럼프의 불법 해병대·주방위군 배치를 막아달라고 긴급 신청을 했다”는 글과 해당 신청서 이미지가 게시됐다. 그런데 트럼프와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을 상대로 제기된 가처분 신청이 즉각 수용되지 않았다. 담당 판사인 찰스 브레이어는 양측 의견을 듣기 위한 정식 심리 날짜(12일)만 정한 것이다.
주방위군 최대 2000명 동원 가능한 행정명령에 트럼프가 서명한 후 해병대 700명 추가 배치를 결정하자 뉴섬이 ‘긴급 가처분 명령’을 요청했으나 브레이어 판사는 트럼프 행정부 요청을 받아들여 이튿날 오후까지 답변서를 제출하게 했다. 이날 오후 법원에 제출된 짤막한 의견서에서 미 법무부는 “뉴섬 주지사의 군배치 중단 요청엔 법적 근거가 없다. (이 요청이 승인된다면) 국토안보부 인력의 안전을 위협하고 연방 정부의 작전 수행 능력을 방해할 것”이라고 밝혔다.
뉴섬은 전날 뉴욕타임스(NYT) 인터뷰 때 LA 내 해병대 배치를 “도발”로 규정하며 “트럼프 대통령이 두려움과 분노를 조장하고 분열을 심화시키기 위해 행동한다”고 비난했다. 이튿날 캐런 배스 LA시장 역시 기자회견을 열어 같은 입장을 보이며 트럼프 정부를 규탄했다.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ICE의 불법이민자 단속에 맞선 사람들의 시위가 폭력화해 경찰관과 민간인 최소 3명, 언론인 5명이 다쳤고 체포된 인원은 56~72명에 이른다. ICE 직원 폭행, 다수의 차량 타이어 절단, 불탄 웨이모 자율차 5대 이상,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CHP) 순찰차 파손, 공공기관 청사 벽·창문에 낙서와 파손, 주변 상점 약탈·파괴 행위가 이어진 가운데 군이 투입된 것이다.
스티븐 밀러(39) 백악관 정책담당 부비서실장 또한 현 사태의 한복판에 서 있다. LA 시위의 배경이 된 불법체류자 추방 정책 설계를 주도한 밀러는 작년 대선 정국에서 “미국은 미국인의, 미국인만을 위한 나라”임을 강조했다. 고향 캘리포니아주 최대 도시이자 ‘꿈의 도시’ LA가 불법체류자들에게 “점령됐다”며 이번 LA 군대 투입 조치를 “문명 수호를 위한 싸움”으로 해석했다. 밀러는 트럼프1기 때 백악관 선임보좌관을 지냈고 차기 국가안보보좌관 후보 물망에도 올라 있다.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 말을 빌면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고 다년간 중용해 온 참모”다.
밀러는 무슬림 이민자의 위험성을 언급하며 미-멕시코 국경 장벽을 주장한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달 10일 불법체류 단속 과정에서 “인신보호청구권 중단 방안 적극 검토”를 만한 것도 주목된다. 당국에 구금된 개인이 ‘신체적 자유 제한의 타당성’을 심사해달라고 법원에 청원할 수 있는 헌법상 권리지만 ‘반란·침략 시 공공 안전을 위해 필요한 경우’ 중단될 수 있다. 미국이 불체자들에게 침략 당한 상황이니 인신보호청구권을 중단할 수 있다는 게 밀러 등의 판단이다.
밀러가 지난달 ICE 본부를 찾아 불법체류자 추방에 속도를 더 내달라 촉구한 것에 대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 핵심 공약인 불법체류자 추방 규모가 정부 출범 이후 목표치에 미달했기 때문에 내려진 지시라고 논평했다. 밀러의 지시 이후 ICE와 연방수사국(FBI) 등의 단속 범위가 대거 확대되면서 사회 갈등이 급격히 악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CBS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4%가 추방 정책 찬성이다. 11일자 ‘더 데일리 비스트’는 밀러가 LA시장의 정부 비판에 대해 “반란 선동”이라며 받아친 것에 주목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게 ABC뉴스의 태도 변화다. 작년 대선 직후 편파 보도 관련 명예 훼손 소송에서 패소한 ABC는 트럼프재단 측에 박물관·도서관 기금 1500만 달러(204억5000만 원)를 기부하기로 합의한 상태다. 이 매체의 수석 정치 기자이자 앵커인 테리 모란이 8일자 엑스에 “밀러는 세계적 수준의 증오자” “본인 스스로 그 점을 자랑스러워한다. 트럼프가 그를 중용한 이유”라고 쓴 직후, ABC는 “객관성이 결여된 자의적 보도”라며 ‘일시 정직’ 처분을 내렸고 이틀 후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는 발표를 했다. 모란을 사실상 해고한 것이다. 다른 주류 언론이 일제히 “진실을 말하는 용감한 언론인”으로 모란을 추켜세운 것과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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