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구명보트’는 좁은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의 심리와 욕망을 잘 표현한 수작으로 꼽힌다. 승객들은 망망대해를 표류하면서도 생존과 직결된 선택의 순간마다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한다.
인간은 극한상황에 놓이면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판단에 의존하기 쉽다. 그런 이유로 총의를 수렴하는 절차가 아무리 민주적 정당성을 갖춘다 한들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 결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최근 우리 사회의 정치적 난맥상은 구명보트 안에 갇힌 승객들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계엄과 탄핵, 대선을 연이어 겪으면서 민주주의라는 신기루는 어느새 저만치 더 멀어지고 말았다. 지식의 이율배반에 따른 독한 회의감을 이기지 못하고 열사(熱沙)의 사막으로 떠난 어느 시인의 심정을 비로소 느끼게 된다.
심리적 내전 상태나 다름없는 이 나라에서 민주주의는 본래의 합목적성을 상실한 지 오래다. 상식이 무너진 사회에서 1인1표제는 어느새 비수가 되어 우리의 목을 겨누고 있다. 혹자는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를 쓰레기통 속의 장미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뒤늦은 자탄(自歎)일 뿐이다. 무임승차자가 이렇게 많은 사회에서는 책임과 권리, 타인에 대한 존중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 같다. 이런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란 ‘개발에 편자’ 격이다.
그래서 고대 철학자들은 민주주의를 그다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에 대해 환상을 갖게 된 것은 주입식 교육과 편견에 힘입은 바 크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다수결의 원칙이다. 만약 매스 미디어를 장악하여 다수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이 존재한다면, 그때의 다수결도 정치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이문열의 소설 속 주인공 엄석대가 그렇고, 후안 페론 전 아르헨티나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 전 칠레 대통령류(類)의 대중영합주의나,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류(類)의 정치적 자원을 독점한 문민통제가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민주주의엔 이런 류의 인물들을 통제할 수 있는 아무런 규제 장치가 없다.
우리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산술적으로 채택했던 다수결의 원칙이 어떻게 악용되는지 도처에서 목도하고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이상향으로 가득 차 있지만, 독일이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등장은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사회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가 된다. 그것도 다수가 원한 것이었다.
민주주의처럼 시간과 절차적 비용이 많이 소요되면서 그 효율성 면에서 인색한 평가를 받는 제도가 없다. 그렇다고 인권이라든가 평등, 자유 같은 부가가치가 타 제도에 비해 월등히 잘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가 정의롭다 착각하기 쉬운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존 롤스는 “정의(right)란 공정한 절차를 거친 ‘합의’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절차적 정당성이 지켜지는 속에서도 불의한 세상은 얼마든지 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 같다.
그럼에도 학교에서는 독재와 싸워 피로써 지킨 민주주의를 부각시키며 정작 민주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윤리적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는 한없이 소홀히 한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언더도그마의 이념적 선전 도구처럼 오도되고 말았다. 오늘날 “이익은 사유화하고 비용은 사회화”하려는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사회가 이렇게 혼란스럽고 극한의 대립 속에 허우적대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중의 사상적·윤리적 기반이 허약할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내적 역량이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합리적인지 성찰할 수 있는 정신적 성숙 단계에 이르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오히려 국민의 생존을 위협하는 합법적인 흉기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당분간 윤리적으로 무장한 파워 엘리트 집단이 선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어리석은 대중을 ‘국민’이란 이름으로 팔아먹으며 정치적 뱃심을 채우는 자들을 언제까지 혈세로 먹여 살릴 수는 없다. 혹독한 교육과 자기 절제 훈련을 거쳐 살아남은 플라톤식 엘리트들의 출현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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