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21] 뜨거운 몸, 차가운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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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6-10 06:30:39

태주가 속으로 웃었을 때 승연은 태주의 위에서 울고 있었다. 몰입하고 탐닉한 끝에 결국 도달한 곳은 비상구 없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승연은 태주의 자취방 창문을 활짝 열었다. 한겨울 찬 공기가 몸에 스며들도록 찬 바람에 몸을 맡긴 승연이 태주가 담배에 불을 붙이자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태주에게 언젠가 물어보려던 게 떠올렸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요? 신입생 환영회 때 나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왔잖아요. 그때 왜 따라왔었죠?”

태주는 기억을 잠시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깔깔대고 웃었다. 그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태주도 웃을 줄 아는구나. 승연은 해맑게 웃는 태주를 관찰했다. 웃는 모습이 별로 기억에 없지만 웃을 때 코를 찡그리는 버릇은 어렴풋이 떠올랐다.

“내 거, 내 거라고 찜한 거지. 내가 따라간 걸 아니까 아무도 너한테 찝쩍대지 않았잖아.” 태주한테 속은 게 억울하기라도 한 것처럼 승연은 눈을 크게 뜨고 놀라는 반응을 했다. “그럼, 왜 그 뒤로 제게 말 걸지 않았어요? 난 내게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요?”

승연은 태주와 마주친 기억을 모두 토해 냈다. 도서관에서, 아름식당에서, 학생회관에서 마주쳤지만 태주는 승연을 무심히 지나치곤 했다. 같이 식사할 때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는 처음 승연을 본 날, 그녀를 자기 여자로 점찍었고 태주의 여자에게 누구도 대시할 수 없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바보야, 너 같은 여자는 남자가 다가가면 도망가는 유형이잖아. 네가 날 좋아할 때까지 기다렸지. 다른 놈들하고 똑같은 취급당하고 싶지 않았어. 기다리면 되는 걸 뭐.”

승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태주가 다가왔다면 분명히 도망갔을 게 뻔했다. 승연도 알고 있었다. 태주에게 관심이 있었다. 태주가 그녀에게 관심을 노출하는 순간 태주에 대한 매력이 떨어졌을 거라는 것을. 태주의 밀당은 태주가 승연 곁을 맴도는 게 아니라 승연이 태주 곁을 맴돌도록 관심 부스러기를 흘리는 것이었다. 농활에 관심을 가지게 했고 사회 과학서를 탐독하게 했다. 승연이 사회 과학서를 학습하면 민중의 본질, 노동의 역학 등을 자연스럽게 숙지하게 될 거라 믿었다. 사랑은 다음이었다. 부르주아 여학생이 의식화되면 쓸모가 많았다. 부르주아지. 소부르주아지 상층을 민족해방운동에 참여하게 하기 위한 적극적인 포섭은 민족해방운동 혁명의 테제였다.

태주는 학습으로 선동되지 않는 사람의 유형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랑이 태동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게 어떤 것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언제나 인간의 본질로 돌아갔다. 사랑할 권리, 사랑받을 자유, 사랑을 나누는 힘은 자유에서 나온다는 것을 승연을 보면서 깨달았다. 자유는 인간의 본질이었다.

승연은 눈을 흘겼고 차가워진 몸을 데워야 한다며 다시 섹스에 몰두했다. 아침이 밝을 때까지 승연은 태주의 몸 안에 있었고 태주는 승연의 바깥에 있었다. 그건 승연도 마찬가지였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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