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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기 위대하던 것들은 이제 부패하였다. 살찐 수도사들을 외면하고 위클리프의 영역 복음서를 몰래 읽는 백성들은 성서의 진리를 성직자의 독점에서 뺐고 독단과 위선의 껍데기를 벗기니 교회의 종소리는 헛되이 울리고 김빠진 찬송가는 먼지 낀 공기의 진동에 불과하였다. 불신과 냉소의 집중 공격으로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교회를 지킬 유일한 방패는 이단 분형령(焚刑令)과 스미스필드의 사형장뿐이었다.”
김성한 선생께 전화를 드린 건 작가 손창섭이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그때 필자는 손창섭에 빠져 있었다. 운명처럼 한국에서 태어나 중국을 거쳐 일본에 가서 학창시절을 보냈던 그를 알고 싶었다. 손창섭의 도일 전 삶에 대해서도 같은 ‘전쟁 세대’로 해방 후, 6·25 전쟁 후 같은 문단 시대를 살았으므로 뭔가 알고 계실 듯했다.
“영역 복음서 비밀 독회에서 돌아온 재봉직공 바비도는 일하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희미한 등불은 연신 깜박인다. 가끔 무서운 소름이 온몸을 스쳐 지나갔다. 생각하면 할수록 못된 세상에 태어난 것만 같다. 순회 재판소는 교구마다 돌아다니면서 차례차례로 이단을 숙청하고 있다. 내일은 이 교구가 걸려들 판이다. 성경만이 진리요, 그 밖의 모든 것은 성직자들의 허구라고 열변을 통하던 경애하는 지도자들도 대개 재판정에서는 영역을 읽는 것이 잘못이요, 성찬의 빵과 포도주는 틀림없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라고 시인하고 전비를 눈물로써 회개하였다.”
그렇다. 공포처럼 한 인간, 한 개체의 삶과 인식을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자기와 나란히 앉아 같은 지도자의 혁신적 성서 강의를 듣고, 그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목숨으로써 지키기를 맹세하던 같은 재봉직공이나 가죽직공들도 모두 맹세를 깨뜨리고 회개함으로써 목숨을 구하였다.”
그래. 목숨처럼 귀한 게 없지. 짐짓 구하면 돼. 아, 나도 ‘목숨’을 구하고 싶다.
“온 영국을 휩쓸고 있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구차한 생명들이 풀잎같이 떨고 있다. 권력을 쥔 자들은 권력 보지에 양심과 양식이 마비되어 이 폭풍에 장단을 맞추고, 힘없는 백성들은 생명의 보전이라는 동물의 본능에 다른 것을 돌아볼 여지가 없다.”
선생님. 저는 아무개라고 합니다. 여쭤 볼 게 있어서 전화드렸어요. 다름 아니오라, 저는 최근에 손창섭 작가 연구를 하고 있었는데요. (…) 선생님, 혹시 손창섭 작가의 생전의 모습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요.
음. (시간이 흘러) 그런데 내가 몸이 좀 많이 아픈 상태예요. 이야기를 이어 가기 어렵네요. 미안해요.
아, 죄송해요. 선생님. 쾌차하시기 빕니다. 다시 전화드릴게요.
“가난한 자, 괴로워 하는 자를 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의일진대, 선천적으로 결정된 운명의 밧줄에 묶여서 라틴 말을 배우지 못한 그들이, 쉬운 말로 복음의 혜택을 받는 것이 어째서 사형을 받아야만 하는 극악무도한 짓이란 말이냐?”
그렇다. 진실을 추구하는 이에게 죄는 없다.
“그러나 다음 순간, 위로 로마 교황부터 아래는 사제에 이르기까지 거창한 조직체가 자기를 억누르고 목을 졸라매는 위압을 느꼈다. 전체 로마 교회와 일개 재봉직공과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대조였다. 선택의 자유는 있을 수 없었다. 죽음이냐, 굴복이냐 두 갈래 길밖에는 없다. 죽음…. 소름이 끼친다.”
선생은 얼마 후인 9월6일 세상을 떠나셨다. 신문들은 숙환 때문이라고 했다. 필자는 그후 너무 죄송스러웠다. 김성한 문학이 아니라 손창섭 문학 때문에 전화 드리지 말았어야 했다. 작가 누구에게나 자신의 문학은 소중한 법이다.
세월이 흘렀다. 삶도, 세월도 다 무상하다. 고통스럽고,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져도 다 한때의 일이다. 세상은 살아도 죽어도 오로지 자신에게만 그것이다.
바비도는 그때 태자의 최후의 만류를 뿌리친다. 바비도의 죽음 앞에서 태자가 말한다.
“나는 오늘날까지 양심이라는 것은 비겁한 놈들의 겉치장이요, 정의는 권력의 버섯인 줄로만 았았더니, 그것들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네가 무섭구나. 네가….”
선생님, 죄송해요. 당신의 ‘요하’를 반드시 정독할게요. 필자는 풀잎같이 떨고 있다. 아니, 풀잎은 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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