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연스럽게 감겨진 눈, 자연스럽게 벌어진 입술, 중력을 받아들이며 자연스럽게 처진 뺨. 인간의 모습이 가장 자연스러울 때가 잠잘 때가 아닐까.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는 눈과 입, 모든 표정을 스스로 제어하고 관리한다. 하지만 잠에 빠지면 인간의 의식은 수면 밑으로 가라앉고 무의식은 꿈속을 헤매며 인체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자면서 표정을 관리하는 사람은 없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론 뮤익 전에 20만 명이 넘는 관객이 다녀갔다. 미술시장 침체기라는 말이 무색하게 전시는 인기 절정이다.

세 개의 전시관 중 제1전시관에서 관객을 처음 맞이하는 작품이 ‘마스크 II’다.
론 뮤익은 남자 마스크를 표현하면서 짧게 자란 머리카락 한 올, 눈썹 한 올, 면도된 턱수염 자국 하나, 미세한 얼굴 주름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잡아냄으로 살아있는 듯한 조각을 만들어 냈다.
이 작품은 두 가지 면에서 충격을 준다. 먼저 관객은 너무나 세밀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마스크 때문에 충격을 받는다. 이게 사람이 만든 조각품이라고 생각하니 더 징그럽다.
두 번째 충격은 뒷면의 진실과 마주할 때 온다. 그렇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입체적인 조각의 뒷면은 그냥 플라스틱(재질은 정확히 모름)이다.
사람 표정까지 떼어낸 듯한 얼굴과 달리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머리통도 없고 머리카락도 없다. 무대의 뒷면을 보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뮤익의 ‘마스크’는 한 편의 연극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살아있음은 진짜인가.
보이는 것을 의심하라.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결코 객관적으로 놓여 있지 않다. 그것은 내 온갖 경험과 지식의 산물이다. 그것은 나만의 안경을 통해 나에게 보여진다.
우리의 살아있음을 누가 보증해 주나. 해묵은 매트릭스 빨간약·파란약 논쟁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담보해 줄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다. 내가 보는 것, 만지는 것, 느끼는 것을 의심할지어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 있다. ‘의심’의 끈을 놓지 않을 때다. 이것이 현대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의 교훈이다. 나는 생각(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론 뮤익의 초기 작품인 ‘유령’은 수영복을 입고 어딘가를 주시하는 소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소녀의 신체적 특징을 고스란히 드러낸, 살아 있는 것 같은 조각에 유령이라는 제목이 붙인 이유는 뭘까.
소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 그의 시선은 어느 곳도 향하지 않는다. 시선이 내면 어딘가를 탐색하는 동안 신체는 할 일이 없다. 뮤익은 무익한 존재인 신체를 잠시 벽에 기대 놓았다. 전통적인 유령은 혼만 있는 상태지만 그가 만든 유령은 몸만 있는 상태다.


제1전시관 마지막 작품이 전시된 곳은 층고 14m의 방이다. 1m가 넘는 해골이 방안 가득 쌓여 있다. 이 작품에는 ‘매스’라는 제목이 붙었다.
‘다량의’로 해석되는 이 작품은 뮤익이 파리 지하 묘지를 방문해 산더미같이 쌓여 있는 뼈를 접하고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설치될 때마다 모습이 달라졌는데 이렇게 세로로 쌓아 올린 것은 이번 처음이라고 한다.
우연이지만 론 뮤익 전시가 이루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은 원래 군사정부 때 보안사(국군기무사령부의 전신)로 쓰였던 곳이다. 폭력과 억압의 상징인 보안사에서 자유와 상상력의 공간으로 변신한 것이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건물 뼈대를 그대로 둔 채 리모델링해 개관했다.
100개의 해골은 곧 100개의 죽음이다. 100개의 죽음을 감상하는 이도 죽음(해골)을 안고 서 있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발 디딘 땅은 수많은 죽음이 쌓이고 쌓인 땅이라는 것을, 우리 안에도 죽음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작품은 환기시킨다.
론 뮤익 전은 7월13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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