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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18] 후회와 자책의 시간
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6-04 06:30:19
 
 
 
승연이 반발했다.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발상이라고 대들었다. 권위로 무장하고 질타에 익숙한 아버지한테 과연 부정(父情)이 있을까, 의심도 했다. 아버지의 불편한 통제가 안전장치였다는 것을 알 나이가 아니었다. 승연은 가족과 선을 긋는 한이 있어도 노동자 중심의 세상을 만들어야 했다. 아버지를 설득해서 허락받는 걸 기대해선 안 됐다. 승연은 무슨 일이 있어도 농활에 참여하겠다고 통보했다.
 
태주는 승연이 자신을 따르려 노력하는 모습이 기특했지만 한편으론 가족과 멀어지는 것이 불편하고 불안했다. 승연은 운동권과 어울리지 않았다. 승연은 잃을 게 많은 사람이다. 운동하는 목적과 명분을 갖고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결핍이 부족했다. 혁명은 진지해야 했고 결사적이어야 했다. 태주는 승연이 운동권의 부속품이 되는 게 싫었다. 기순이나 철규도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다. 태주가 아무리 뛰어나도 운동권 내에선 메이저 캠 주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태주가 그들과 부딪히기 시작한 시점도 그 무렵이었다.
 
계급 모순에 주목했던 자신의 계파와 달리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민족주의·반제반미를 기치로 들고 나온 주사파와 사사건건 충돌했다. 그들과 노동운동의 목적이 달랐다. 하지만 5·3 대회처럼 큰 이슈에서는 지엽적인 이슈를 잠시 접고 대동단결해야 했다. 승연 아버지 오정일이 7월 사고로 죽었을 때 승연은 농활 중이었고, 태주는 오정일의 회사 근처 청천동에 있었다. 승연의 자책은 태주에게 큰 짐이 되었다. 태주가 산단지역 공장 수백 개를 분석한 결과 정일어패럴은 건실한 기업이었고 근로자들의 복지·후생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였다.
 
해고된 김씨는 이미 다른 공장에서 문제를 일으켜 해고된 사실을 숨기고 정일어패럴에 타인 신분으로 위장 취업한 요주의 인물이었다. 승연 아버지의 죽음은 태주에게도 충격이었다. 연인의 아버지이기도 했지만 분신 협박 사주나 하는 강성 노조야말로 어용노조였기 때문이다. 태주는 전태일 이후로 노동자들이 몸에 기름을 붓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려는 태도가 하나의 의식처럼 흐른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태주는 승연을 볼 낯이 없었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고 설득할 수 없는 위로는 더욱 잔인하리라는 걸 알았다.
 
태주가 승연을 만난 건 아버지 오정일의 49재가 끝난 9월 말이었다. 해 지는 놀이터엔 웬일인지 아이들이 별로 없었다. 여름에 미련이 남은 듯, 한 줄 바람도 허락하지 않는 날씨였다. 그네에 걸터앉은 승연이 고개를 숙인 채 발로 땅바닥을 긁어 그네를 앞뒤로 밀고 있었다. 그녀는 심한 자책과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반쪽 얼굴엔 후회와 회한이 그대로 드러났다. 태주는 자책하는 승연에게 말했다. 만약, 승연이 농활에 안 갔다면 아버지가 살아 계실까. 아버지와 화해했다면 아버지가 사고를 피할 수 있었을까. 원래, 죽음은 계획이 없는 거야. 죽음은 갑자기 날아오는 돌멩이 같은 거라고,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겠지만 자책에서 벗어나길 바랐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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