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9일은 안 좋은 소식이 연거푸 들려온 날이었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누란의 사랑’ ‘둔황의 사랑’의 작가 윤후명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판에, 창작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1990)’의 작가 김영현의 부음 소식까지 들려온 것이다.
저녁에 채만식문학상 제3회 시상식이 있었다.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창작집 ‘내가 아직 조금 남아 있을 때’의 서성란 씨 부군이 상을 대신해서 받는 장면을 지켜보고, 빗속을 뚫고 대학로 건너편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윤후명 선생의 빈소를 찾았었다. 이것만 해도 필자로서는 충격이 컸다. 윤후명 선생의 말년에 필자는 당신을 심정적으로 아주 가깝게 느꼈었다. 빈소에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내내 가슴 아파하며 집으로 오는데, 또 하나의 부음이 들려왔다. 김영현 작가의 별세 소식이었다.
두 해 전이었나, 뇌출혈 증세로 말이 어눌해지기는 했어도 전반적으로 많이 좋아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직접 통화한 것은 꽤 오래전이었다. 마지막 장편소설이 된 ‘열세 번째 사도―배신자 가룟 유다에 관한 또 하나의 다른 이야기(푸른사상, 2023)’의 원고를 탈고했다고 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해설의 글을 직접 쓸 수는 없었지만, 묵직하고 깊은 주제의식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작품인 듯했다. 지난 겨울엔가 필자가 편집하는 잡지 ‘맥’에 작가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집중 서평이 될 만한 장문의 글을 청탁해서 실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열세 번째 사도’는 예수를 유대인 제사장들에게 팔아먹은 배신자로 알려진 유다가 사실은 그의 가장 충직한 사도 가운데 하나였다는 이야기다. 생전에 철학적·종교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곤 했던 김영현 작가다운 심각한 주제의 이야기다. 추리소설·탐정소설의 기법으로 플롯을 삼은 것은 숨겨진 사연을 추적해야 하는 이 작품의 과제 때문이었다.
작품 속에서 ‘유다 계시록’의 존재가 부각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고 몰래 동방으로 가서 몸을 숨긴 유다가 말년에 남겼다는 경전이다. 이 ‘계시록’의 행방을 둘러싸고 쫓고 쫓기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유다의 ‘계시록’을 손에 넣고 그의 동방 정교를 연구하다 목숨을 잃은 윤기철 교수, 끝내 “유다 계시록”을 없애 버려야 하는 사명을 띠고 한국에 온 수도사 ‘그레고리’, 비밀리에 전해지다 행방을 감춘 ‘경전’을 찾아내야 하는 네팔 청년 ‘하잔’ 등의 비밀스러운 사연이 내내 흥미롭게 전개된다.
김영현 작가의 실천문학사 대표 시절이 생각난다. 1990년대 중·후반. 세상은 이른바 ‘운동권’ 문학인들에게 ‘후일담’이라 통칭되는 흘러간 이야기만을 허용하는 듯했고, 실천문학사는 겨우 간판만을 유지한 채 춥고 배고프게 지내고 있었다. 그때 이 김영현 작가가 대표가 되어 현기영 선생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1999)’, 박완서 선생의 ‘아주 오래된 농담(2000)’ 등으로 회복의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반짝하고 마지막 생명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는 것 같던 시절이었다. ‘운동권’은 춥고 배고파야 한다면 그때 김영현 작가는 한 사람의 신선한 ‘가룟 유다’였다. 그런 그가 떠나고도 실천문학사는 용케도 아직 생명을 이어 가고 있다.
‘열세 번째 사도’의 유다의 진실을 둘러싼 추적은 어떤 ‘사태’가 일단락되고 공고화되고 난 후 이른바 진실로 통용되는 이야기들이 ‘진짜’ 사실과는 전혀 다를 수 있음을 말한다. 그 시대에 유다는 ‘열심당원(젤롯·zelotes)’이었다고 전해진다. 로마와 로마의 앞잡이들에 대한 가열한 투쟁심을 간직한 채 예수의 비밀스러운 가르침을 따랐던 유다의 감추어진 진실은 예수의 가르침이 지배자들에 의해 국교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에서 영원한 배신자의 모습으로 변질, 왜곡되고 만다.
작중의 여성 인물이 유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거의 다 밝혀질 즈음에 이렇게 말한다. “…한번 흘러간 강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아요. 설사 그 책이 진짜 가룟 유다가 남긴 계시록이라 하더라도 이미 한 편의 드라마는 이루어졌고, 그들 모두 무대 위에서 내려온 지 오래되었어요. 각자의 역할을 다한 것이죠. 사탄으로 낙인 찍힌 게 억울하다 하더라도 그건 그 무대 위 드라마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역할이었고, 그것으로 예수가 주인공인 예수 드라마 속 그의 임무는 끝났어요.”
이 대사는 마치 작금의 시국 현실을 말해 주는 것과도 같다. 그렇지 않다고, 필자는 독백해 본다. 진실은 어떻게든 드러나야 한다. 시간이, 판도가 진실을 가리고 왜곡하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 작가인 김영현도 이 대사와 ‘정확히’ 다른 생각을 가졌던 것이라고, 깊은 위화감 속에서 안도해 본다. 그러나 현실은 과연 어떻게 되는 것일까.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