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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의 90번째 생일이 티베트 문제가 안고 있는 국제정치의 현실을 새삼 일깨웠다. 6일 달라이 라마의 망명지인 인도 북부 다람살라의 사원 앞마당에서 기념행사가 열린 가운데 미국·인도·대만이 공식 메시지를 낸 것만 봐도 핵심은 ‘중국 견제’임을 알 수 있다.
앞서 사흘간 열린 회의 일정 모두에서 달라이 라마가 환생자를 지목하는 ‘전통 방식의 후계 옹립’과 ‘간섭 불허’ 원칙을 천명한 것은 중국 정부와의 정면 대결을 의미한다. 이에 서방 세계가 공감과 지지를 표한 반면 중국 정부는 즉각 ‘내정 간섭’이라며 정부 개입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해외 원조를 대폭 줄였던 미국 정부가 최근 연간 약 93억 원의 티베트 지원금을 되살렸다. 티베트 지원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위험성을 간파한 도널드 트럼프 1기 때인 2018년경이었다. 이번에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티베트인의 존엄과 인권에 대한 미국의 초당적 지지와 고유한 종교·문화·언어적 정체성 보존에 대한 지원 의사를 밝혔다.
이런 흐름과 승계권 주도 선언으로 티베트 망명 공동체의 정체성·정통성 강화와 재결집 효과, 국제 여론전에서 우위를 점할 기반이 마련됐다. 중국은 반발할수록 외교적 고립을 면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제14대인 현 달라이 라마는 1935년 7월6일 티베트 동북부 마을에서 태어나 두 살 반 때 전임자의 환생으로 지목돼 정식 수행을 거쳤다. 티베트불교(겔룩파)의 최고 수장이자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칭호 ‘달라이 라마’(바다 같은 지혜의 스승)가 몽골어·티베트어의 조합이라면 이를 티베트어로 풀이한 게 그의 법명인 ‘텐진 갸초’다. 부모에게 받은 세속명 ‘람똘 둔둡’도 ‘신성한 여인이 바라는 바를 성취하다’를 뜻한다니 예사롭지 않다. 이게 티베트 민중들 사이에서 두루 쓰이는 평범한 이름이라 해서 다시 한번 놀랐다.
달라이 라마가 고향 땅을 탈출한 것은 1959년 3월이었다. 중공군이 진주한 지 9년 만에 반정부 시위 실패 후 포위망을 뚫고 14일간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약 2600km의 험난한 여정이었다.
한편 중국 내부와 망명 고승들이 교신하며 11대 판첸 라마(제2인자)로 추천해 달라이 라마의 인정을 받은 6세 어린이가 1995년 5월 가족과 함께 연행·실종돼 지금까지 행방불명이다. 서방 인권단체들이 이를 거론할 때마다 중국 정부에선 “안전하게 잘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현 판첸 라마인 갸첸 노르부(35)는 정부에 의해 ‘체제 내 고승’으로 육성된 인물이다.
2015년 8월 제6차 전국티베트업무좌담회에선 시진핑 국가 주석이 “나라를 다스리려면 변방을 다스려야 하고 변방을 다스리려면 티베트 안정이 우선”임을 내세웠으며, 미·중 대결 구도가 뚜렷해질수록 티베트의 전략적 중요성은 높아졌다. 2020년 “시짱(티베트) 평화해방 70주년” 현장 시찰 역시 ‘공산당의 영도야말로 티베트 번영의 조건’이라는 주장을 담은 정책적 행보였다. 지난달 “(중국특색사회주의에 발맞춘) 종교의 중국화”를 강조한 자리에선 ‘관제’ 판첸 라마의 충성 맹세도 재확인됐다.
중국은 한반도의 고대 왕국들을 중국사의 일부로 설명하고자 시도하기 훨씬 이전부터 티베트 역사를 자기 것으로 간주해 왔다. 이 모두 보편적 공감을 얻기 힘들고 국가권력이 종교를 지배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 또한 자유 세계의 상식과 괴리된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게 개인 생각일 수 있어도 이를 국시로 강요하면 심각한 사태로 이어진다. 종교(신앙)의 자유를 ‘양심(내면)의 자유’와 동일시하며 지고의 가치인 ‘개인’을 완성하는 조건이자 상호보완적 가치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수백 년에 걸쳐 서구 왕권·교황권 간에 우여곡절 끝에 도출된 원칙이며, 이 결론을 전 세계 자유 헌정 질서가 대부분 공유한다. 이를 피바다의 과정 없이 거저 누려 온 대한민국도 축복받은 나라다.
승정(僧政) 일치였던 옛날과 달리 2001년 이래 티베트 망명정부는 사실상 입헌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총리(세속 통치자)를 직접 선거로 선출하고 있으며, 2011년 3월에는 달라이 라마가 정치지도자 역할에서 완전 은퇴할 것을 선언했다.
달라이 라마로 상징되던 티베트의 정치적 운명도 약 70년간 기복을 겪었다. 동·서 냉전시대였던 망명 직후엔 세상을 향해 부당한 상황을 뜨겁게 호소한 편이라면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고도성장기엔 “고도 자치”를 전제로 한 방향성이 힘을 얻었다. 중국의 물질적 풍요가 조만간 자유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낙관적 기대가 대세였기 때문이다.
달라이 라마의 노벨평화상 수상(1989) 이후 그러나 미·중 밀월의 심화 속에서 티베트는 3월에 나온 달라이 라마의 회고록 제목처럼 ‘소리 없는 목소리’였다. 그의 입장이 서구 지식인들 취향에 맞게 변해 간다는 지적도 있으나 초월적인 것을 향한 신앙의 자유가 왜 중요한지 상징해 주는 존재임엔 변함 없다.
우남 이승만이 1923년 공산주의의 장단점을 명쾌하게 정리한 글 ‘공산주의 당부당’에서 ‘종교 제거’를 잘못된 다섯 가지 중 하나로 지적한 것은 인의·도덕의 쇠퇴만을 우려한 게 아니었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라야 ‘종교를 안 가질 자유’도 있다는 인식에서 나온 지혜로운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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