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소설의 주인공은 온통 돼지들이다. 영국의 어느 곳, 메너 존스라는 사람의 농장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그런데, 사람이 아니라 동물들이다.
이야기는 늙은 수퇘지 ‘메이저’가 꿈을 꾼 데서 시작된다. 메이저는 농장의 동물들을 불러 모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들은 목숨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먹이만을 얻어먹고 힘이 붙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혹사를 당한다. 쓸모가 없어지면 그날로 즉시 참혹하게 도살을 당한다. 한 살 이후로는 행복이나 여가를 알지 못하고, 어떤 동물도 자유롭지 못하다. 동물들의 삶은 노예 상태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그것은 모두 인간 때문이다. 동물들이 노동해서 생산한 것을 인간이 몽땅 도둑질해 가기 때문이다. 만악(萬惡)의 근원인 인간을 몰아내야 한다. 인간은 자신들의 진정한 적이자 유일한 적이다. 인간을 몰아내면 굶주림과 고된 노동은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참 맞는 말이다’. 메이저가 꾼 꿈은 인간들이 사라진 세상에 관한 것이었다. 꿈을 통해 그가 기억해 낸 ‘동물들의 노래’는 “곧 그날이 오리 / 독재자 인간이 쫓겨나고 / 영국의 기름진 들판이 / 짐승들의 것으로 돌아오는 그날이”라는 것이었다.
며칠 후 늙은 수퇘지 메이저는 세상을 떠난다. 농장의 동물들은 메이저가 남긴 사상을 ‘동물주의’로 이름 지어 완벽한 사상 체계로 발전시킨다. 그 주역은 세 마리의 돼지들, ‘나폴레옹’과 ‘스노볼’ ‘스퀼러’다. 돼지들이 영리하다는 속설은 이 소설에서 역시 ‘사실’로 증명된다. 마침내 그들의 반란이 승리한다. 동물들은 나폴레옹과 스노볼의 지도 아래 새로운 세상을 ‘건설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하나의 우화, 알레고리다. ‘1984(1949)’의 작가 조지 오웰은 그 전에 먼저 ‘동물농장(1945)’을 썼다. 오웰은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그것을 대체한다고 주장했던 전체주의적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모두 비판적이었다.
진짜 돼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소설 속 돼지들은 영리하기도 하고 탐욕스럽기도 하다. 이 탐욕스러움을 대변하는 것은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은 혁명을 같이 한 스노볼을 농장 바깥으로 내쫓고 스노볼의 아이디어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 스퀼러는 나폴레옹과 한패가 된다. 나폴레옹과 그를 따르는 돼지들의 이익을 위해 알파벳조차 읽어내기 어려워하는 동물들을 조삼모사(朝三暮四), 지록위마(指鹿爲馬), 견강부회(牽强附會)의 교묘한 이야기들로 잘도 속여 넘긴다.
돼지들은 농장의 동물들을 위해 불철주야 열심히 머리를 쓰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다소의 특별한 대우가 필요하다. 돼지들은 우유와 사과를 먹어야 하고, 돼지들 스스로 제시한 ‘7계명’에 다소 어긋나는 일들을 행해도 용납되어야 한다. 동물들끼리는 서로 죽여서는 절대로 안 되지만 어떤 이유가 있다면 용납될 수 있다. 어떤 동물도 (인간들의) 침대에서 자면 안 된다는 계명은 인간들이 쓰는 시트를 써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바뀐다. 동물들은 술을 마시면 안 된다는 계명도 비밀리에, 그러다가 공공연히, 돼지들에게는 용납될 수 있는 것이 된다. 동물들의 제1계명은 “무엇이든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는 것이다. 소설의 결말에 가까이 가면 독자들은 돼지들이 두 발로 걷는 것을 보게 된다.
슬프다. 소설 속에서 농장의 동물들은 잘도 속는다. 가장 안쓰러운 것은 짐수레 끌던 말 복서다. 복서는 ‘나폴레옹주의’의 충직한 신도다. 자신의 무서운 괴력을 숨이 다할 때까지 농장을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 바친다.
필자가 오래전부터 생각한 것이 하나 있다. 사람들은 상식을 믿는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런 상식을 이용해서, 그것에 기대어 늘 음모를 꾸민다. 그 상식 위에 군림하면서도 자신들의 특권을 정당화하는 논법을 잘도 구사한다. 자신들은 적당히 부패해도 된다. 선거는 잘 속여 넘기는 행위다. 그 음모를 간파한 자들에게는 ‘음모론자’라는 딱지를 붙여 농장 바깥으로 내몬다.
소설 속에서 혼자 생각을 하는 단 하나의 동물이 있다. 당나귀 ‘벤저민’이다. 음모에 휘둘려 광기를 부리기까지 하는 동물들이 있건만 벤저민은 고요히, 어느 쪽 편에도 서지 않는다. 아마도 동물들 세계의 노자(老子)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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