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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24] 태주의 시간
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6-13 06:30:22
 
 
투표함 위에서 사흘 밤낮을 지내겠다며 투지를 불사르던 동지였다. 경찰에 목덜미가 잡힌 그가 젖은 시래기처럼 질질 끌려갔다. 이 빨갱이 새끼들 다 쓸어 버려! 누군가의 고함이 연기 속을 뚫고 나왔다. 태주는 사방을 둘러봤다. 누군가를 구할 상황이 아니었다. 구청 마당을 탈환한 경찰이 확성기를 통해 경찰은 시민 여러분의 안전한 귀가를 위해 최선을 다할 거다, 더 이상 혼란을 초래하지 말고 경찰에 협조 바란다,고 설득했다.
 
태주가 재빠르게 옥상을 향해 달음질하고 있는데 두두두두 헬기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이 옥상을 장악할 모양이었다. 태주는 도망갈 곳이 없었다. 계단 아래로 의기양양한 백골단이 치고 올라왔다. 태주와 일행은 옥상을 향했다. 옥상에는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마대 자루나 돌멩이 따위를 들고 있는 사람이 몇 있었으나 대부분은 위협이 될 만한 흉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모습이 오합지졸이었다.
 
헬기가 가까이 다가오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옥상 구석으로 몰려갔다. 헬기에서 순식간에 방독면을 한 경찰이 내려왔다. 손에 곤봉이 들렸다. 몰려오는 경찰을 향해 태주가 달려갔다. 태주 뒤를 이어 대학생들이 소리 지르며 경찰에 달려들었다. 태주는 싸움에 이력이 난 존재였다. 각목 들고 싸우거나 투석전에 강한 것은 태주가 노동 현장에서 키운 체력 덕분이었다. 육체노동은 빨리 끝내고 견디는 힘을 단련시켰다.
 
그렇긴 해도 태주가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경찰과의 대결에서 이길 순 없었다. 힘겹게 한두 명 제압할 정도지 무리와 싸워서 이기는 전설의 영웅이 아니었다. 가끔, 초인적인 힘이 나오긴 했다. 절박함이었다. 절박함이 생존을 가능케 했다. 자물쇠와 책·걸상으로 굳게 닫힌 옥상 문이 열렸다. 헬맷과 방독면을 쓴 백골단이 으르렁거리며 다가왔다. 얼굴이 방독면으로 가려졌으나 그들은 분명 웃고 있었다. 죽고 싶어 환장했냐, 죽여 주마. 그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따위의 선처는 고려하지 않는 듯했다. 어쭈, 네까짓 것들이 감히 개겨? 자비는 없었다.
 
수십 명이 한 발 한 발 저승사자처럼 다가왔다. 태주와 일행이 물러설 곳은 없었다. 전투경찰 무리가 앞에서, 옥상 문을 따고 들이닥친 백골단 무리는 옆에서 조여 왔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허공을 향해서라도 저항 의지를 보여야 했다. 다가오던 백골단 무리 중 한 명이 갑자기 속도를 높여 태주를 향해 뛰었다. 태주는 그를 피하려고 옥상 난간으로 뛰어올랐다. 몸이 중심을 잃고 휘청했다.
 
애초에 가진 게 없었다. 그래도 버릴 것이 있다면, 적어도 다른 선택할 여지나 기회가 있다면 궁핍한 삶일지라도 노동자의 소박한 미소쯤은 온전히 권리로 돌려줘야겠단 생각이었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욕심이 아니라. 그리고 그들의 미소를 어떻게 유지하게 할지, 전태일을 통해 배웠다. 태주는 온몸을 불사르며 호소했던 전태일의 삶 속에 자신을 투영했다. 태주의 문제의식과 전태일의 고민은 다르지 않았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이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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