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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연은 태주의 말을 이해했다. 그렇다고 고통이 덜어지거나 슬픔이 달래지지는 않았다. 태주는 긴 침묵 끝에 승연에게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동료나 친구의 비극과 다르다, 남은 가족 품으로 돌아가라 했다. 승연은 대답 대신 눈물을 흘렸다. 승연에게 의미 있는 일은 남아 있지 않았다. 집에 가자, 태주가 승연의 손을 잡자 승연은 태주 품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 나 더 이상 못 하겠어.” 태주는 있는 힘껏 승연을 끌어안았고 그녀 입술에 입맞춤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자신 때문이라며 자책하는 것은 남은 자의 자기 위로였고 망자에 대한 변명이었다. 승연이 아버지 말을 거스르지 않고 농활에 참여하지 않았어도, 최루탄 연기가 폴폴 나는 시위 현장을 어슬렁거리지 않았어도 발생할 일이었다. 사건은 누구의 책임과 무관하다. 승연의 흐르는 눈물이 볼을 타고 입술 안으로, 혀끝에 닿았다.
7월 무(無)노조 왕국 현대그룹에 노동조합들이 결성된 걸 계기로 노조 설립은 도미노처럼 번져 나갔다. 노조가 설립되자마자 각 사업장에서 노동쟁의가 산불처럼 일어났다. 특히 어느 지역은 마치 노동자들의 해방구가 된 듯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다. 도시마다 임금인상, 근로 환경 개선 등을 요구하는 노동 민주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물론 이는 운동권, 재야, 시민들의 6월 항쟁 결과였고 여당 대표의 직선제 선언 이후 발생한 민주화 수순이었다.
노동자 대투쟁은 7월, 8월, 9월까지 이어졌다. 6월 항쟁의 정치적 효과이긴 하지만 평화시장 재단사였던 전태일의 항거가 밀알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더는 누구도 자살로 투쟁하지 말고 살아서 싸우라 했던 전태일 어머니의 당부는 소용없었다. 목숨을 담보로 한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제물은 더 싸우기 위한 명분으로서 필요했다. 민주 제단에 올릴 피와 살은 순서를 기다리는 행동대장, 인자들의 몫이었다. 민주를 위해 민족을 위해 국가를 위해 기꺼이 한 몸 바쳐 승화할 상징물은 그리 거창하지 않아도 됐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민중의 분노는 눈송이처럼 커질 테니까.
태주는 전태일의 결단이 혼자만의 결정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전태일은 미국의 급진주의 사회운동가 사울 알린스키에게 영향받은 한국기독학생총연맹 오태근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고 잠자는 민중을 깨워 리더를 양성한 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교육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주는 전태일의 분신 현장에 누군가 있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언젠가 박철규도 태주 자신도 민주 제단의 제물이 될 거라고 예상했다.
결국 1987년 11월 8차 개정에서 노조 설립 형태를 근로자의 의사에 따르도록 자율화했고, 노조 설립 신고 서류 간소화, 신고증 교부 기간 단축 등 많은 성과가 있었다. 투쟁의 결과였다. 달걀로 친 바위가 조금씩 부식되고 갈라지고 있었다. 직선제가 열렸으니 대통령 선거에서 반드시 군부가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끝내는 일만 남았다. 12월16일 대선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거가 되었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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