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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정의감에 사로잡혀서 말이야. 최 머시기 게이트, 이 머시기 게이트 이런 부정부패 관련 사건 말이야, 지금과 비교해 봐. 새 발의 피지. 지금은 핵폭탄급 비리가 터져도 입 뻥긋 안 하잖아. 그리고 또, 당신 생각 안 나? 87년 영등포구청 대선 부정선거 의혹 사건. 트럭 빵 상자 안에서 봉인되지 않은 부정투표함이 발견됐다고 대학생들이 투표함 못 가져가게 깔고 앉아서 버텼지. 사흘간이나 투표함 사수한다고 투쟁하던 결기들, 사회정의에 대한 열기는 다 어디로 갔냐고. 결국 29년 만에 봉인 해제 후 부정선거는 아니었다는 게 드러났지만. 민주화니 뭐니, 하루가 멀다고 화염병 던지며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시위했던 시절이었잖아. 부당한 권력이긴 했나? 지금은?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냐?”
승연은 남편 입에서 영등포구청 부정선거 의혹 얘기가 나오자 바느질하던 동작을 멈췄다. 바늘에 손가락이 찔렸다. 87년의 기억이 빨간 핏물보다 선명하게 떠올랐다.
승연의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후 승연은 물론 태주까지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승연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자기 탓이라 했고 태주는 그런 승연을 이끌었던 자신 탓이라고 생각했다. 망월동 묘지 방문 이후 승연은 태주와 사랑이 깊어졌다. 그들의 만남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승연은 태주가 하는 일을 이해하려 했고 혁명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었다. 태주의 혁명은, 노동자가 자본가의 이익을 함께 공유하는 세상을 위한 것이었다.
태주는 승연에게 필수 사회과학서를 친절하고 쉽게 설명했다. 승연은 태주를 1, 2주에 한 번씩 만났다. 등잔 밑이 어두웠다. 승연이 사는 서교동 주택가 근처 빵집·분식점·놀이터는 태주가 공권력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만날 수 있는 안전한 장소였다. 태주는 5·3 인천 대회가 있기 훨씬 전부터 인천 청천동에 하숙집을 구해 노조 설립 활동 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승연과 상부 조직이나 지시 내용 등의 보안 사항은 전혀 공유하지 않았으나 승연이 감당할 역량 내에서 학습과 활동 범위를 조정해 주곤 했다.
5월3일도 시민회관 근처에서만 움직이라고 신신당부했다. 승연은 2학년 여름방학이 되자 농활 준비로 정신없었다. 장구 연주가 제법 손에 익었다. 손에 힘을 주지 않고 궁채 잡는 수준에 이르자 연주가 훨씬 부드럽고 자연스러워졌다. 농활이 전북 익산 농협으로 정해지자 승연은 들떴다. 구체적이진 않지만 민주에 동참하는 느낌이었다. 망월동은 아버지께 동기 부친 문상을 간다고 속였고 농활은 며칠씩 걸렸으므로 사실대로 말해야 했다.
아버지는 허락하지 않았다. 딸자식의 외박은 불허하는 게 아버지 방침이었다. 게다가 승연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상황을 믿지 않았다. 아버지는 농촌활동 자체를 부정적으로 인식하셨다. 농부들을 도와 봉사하는 건 단위 지역 공무원들이 해야 할 일이지, 젊은 대학생들이 나서는 건 맞지 않다며 사고 소지가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여염집 숙녀가 아무 데서나 잠자고 다녀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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