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 게으른 놈이다. 형님을 지난 설날에 찾아뵌 뒤로는 바쁘다는 핑계로 아직 문안 인사도 못 드렸다.
얼굴 한번 못 뵙고, 목소리조차 들어 보지 못한 큰형님은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계신다. 월남에서 한 줌 재로 돌아오셨는데 이제 형님을 챙길 여력이 남은 막내동생 하나가 역할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서울과 대전에 30만 명이 넘는 호국영령들께서 잠들어 계시니, 이것이 특별한 사적 기억이 아님은 분명하다.
또 다른 형님은 5·18 민주유공자다. 광주에서 희생되신 분들과는 약간은 다른 결을 갖는다. 5·18 항쟁 당시 광주의 소식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계엄 상황에서 검열을 핑계로 비겁한 언론은 침묵했고 광주의 비극은 철저히 차단됐다.
언론의 침묵에 맞서 형님은 서울 도심에서 광주 항쟁 소식을 알리는 전단지를 거리에 뿌렸고, 계엄법 위반으로 체포되셨다.

역설의 연속인 게, 이후 부모님은 소천하시면서 “북한 어린이의 배고픔을 달래 주라”며 삶의 모든 결실을 사회에 온전히 환원하셨다. 부모님의 의중은 명료하고 단순했다. “그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굶게 놔 두냐”는 것이었다.
공돈만도 못 한 유산이 아니라 평생 간직할 자랑거리를 남겨 주신 부모님께 늘 감사드린다.
거짓말 같은 이야기라면 검증해도 좋다. 전쟁기념관에서 큰형님의 존함을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고, 5·18 사료나 신문을 찾아보면 또 다른 형님의 이름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던 부모님의 이야기는 지방지 한 곳에 뒤늦게 소개됐다.
은퇴할 즈음 한 번은 꼭 쓰고 싶었던 회고록의 한 부분이고, 이제야 적절한 시점이 된 듯해 무르익지는 않았지만 에필로그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글을 쓴다. 또 개인사로 이야기를 끌어 가는 이유는 문학이나 철학, 역사에 기대어 그럴싸한 이론을 내세우는 글을 좋아하지 않아서다. 공허한 이론의 포장인 경우가 태반이다.
1980년 5월18일, 침묵했던 언론은 여전히 부끄러움을 모르고 시민의 저항은 폭도의 난동으로 뒤바뀌었고 이야기는 결국 간첩이라는 레퍼토리로 수렴됐다. 이제 아픈 역사는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믿음의 영역으로까지 진입했다.
이념과 논조, 시간에 따라 바뀌는 변덕스러운 글들과 달리 처절했던 광주를 묵도했던 소년의 기억은 편린으로 남았지만 여전히 또렷하고, 그러한 글들과는 어쩔 수 없이 충돌한다.
시간은 흘러 기자가 되었고, 잠시 기자 생활을 돌아본 적이 있다. 가장 잘한 일이 뭘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또 다른 역설이지만 ‘기사를 쓰지 않은 것’이었다.
제보하신 분 덕분에 굵직한 회사 하나가 심각한 불법을 저지른 사실을 단독 보도할 기회를 잡았다. 말 그대로 특종이었다. 이후 기사화하지 않았고, 불법을 눈감아 주는 매우 부도덕한 협상을 진행했다. 성공적으로 합의가 이뤄지면서 몇 곳의 고아원에 꽤나 큰 금액의 후원금을 약속받았다.
긴 세월에 비해 무능한 기자였는지, 여전히 이보다 더 잘한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정의를 세워야 하는 투철한 기자 정신이 없다는 비판에 직면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똑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져도 같은 결과를 향할 것 같다. 최소한 비겁한 침묵은 아니었다는 정도가 내 변명의 전부다.
이데올로기 갈등이나 흑백 논리만 제거하면 이런 저런 일이 많았지만 평범한 이야기다.
이 나이쯤 되면 조금은 현명해지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여직 아버지의 그림자조차 따라가지 못한다. 그런 연유로 아픔을 보듬어 내지 못하는 진실이나 정의라는 주장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아직은 재단할 수준이 못 된다.
선명한 구분은 판단을 쉽게 만들지만, 언제나 누군가의 고통을 언저리로 밀어낸다. 옳고 그름을 나누는 틀 안에서 아픔은 종종 불편한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가장 위험한 건, 내가 옳다고 믿는 그 확신이 타인의 고통을 정당화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끝내 그 고통을 의도하기까지 하는 순간이다. 정당한 분노라 말하지만, 사실은 혐오를 향해 걸어간다.
스카이데일리에는 그런 글들이 적잖다. 진영을 바라볼 뿐 사람을 향하지 않는 그런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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