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학교, 우리 세대는 아직도 ‘국민학교’라고 부르는 그곳은 많은 추억이 쌓여 있는 곳이다.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놀이를 할 때 가장 중요한 룰(rull)은 ‘선(線)’을 지키고 안 넘어가는 것이었다.
사소한 놀이의 범주를 넘어 세상의 모든 것에는 넘지 말아야 할 ‘보이지 않는 선’이 있으며 그 원칙이 무너질 경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국가도, 사회도, 인간관계도, 부부관계도 일순간 화가 난다고 혹은 감정이 상한다고 그 선을 넘는 순간 모든 것이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란 범위는 개인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히 큰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나 실제로는 국가의 존망을 가르는 중요한 사안조차 이성에 기반한 합리적 판단보다는 ‘결정하는 사람’의 감정에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태반이다. 잘 갖추어진 의사결정 시스템이 존재하더라도 현실 속에서의 국정 운영은 ‘집단 지성’이 아닌 권력자의 주장과 자리에 연연하는 영혼 없는 각료들에 의해 ‘집단 사고’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번 조기 대선의 근본적 원인이 된 그 사건, 2024년 12월3일 밤 10시30분경 발령된 계엄령 선포 역시 그 근본적 목적의 정당성을 논하기 전에 그날 ‘국가급 의사결정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했을까 하는 의구심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는 뒤늦게 자신의 생각은 ‘계엄 반대’였다고 말하는 국무의원들의 자기 방어적 모습 속에서 쉽게 직감할 수 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국회의사당에서 야당 의원이 출석한 국무의원들을 대상으로 ‘일어서라’ 고 했을 때 끝까지 침묵으로 저항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던 김문수 고용노동부장관은 그 강인한 모습으로 인해 지지 기반이 약하던 여당의 대선후보로 오르기에 이른다. 그러나 최근 ‘계엄령 선포에 대한 사과’를 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얼마 남지 않은 기간 동안 표심을 더 확보하려는 정치적 행보로, 많은 국민이 그의 투철한 국가관과 철학엔 일절 변함이 없을 것으로 이해한다.
애당초 가장 강력한 후보였으나 예상과 달리 조기에 4강에서 고배를 마신 홍준표 후보의 캠프에 참여했던 일부 인사들의 행동이 연일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삼국지의 제갈량이라도 되는 듯 ‘정책 책사’라 불리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가운데 영입된 모 대학 경제학 교수는 홍 후보가 탈락하자 얼마 되지도 않아 별안간 이재명 후보 캠프로 옮긴다는 장문의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더불어민주당으로 가서 ‘자유시장경제의 신념’을 펼치겠다는 얘기였다. 수많은 언론사들이 이 소식을 보도했지만 하루도 안 되어 이재명 캠프에서는 그의 과거 행적을 문제 삼아 영입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설령 갔더라도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같은 날, 선거 활동에 참가했었다는 ‘홍준표와 함께한 사람들’이라는 알 수 없는 단체가 ‘이재명 후보 지지’ 선언을 하고 나섰다.
무릇 정치란 서로 다른 세계관·사회관·경제관·안보관 등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그룹들 간의 대결이다. 특히나 공산주의 세력이 80년 가까이 한반도의 절반을 무력으로 강점하고 있는 현실로 볼 때 대한민국의 정치 상황은 여느 국가의 일반적 정치 대결의 범주를 넘어선 ‘체제 전쟁’으로 해석된다. 총과 칼만 안 들었지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선 과정에서 각종 음모설이 뒤엉킨 가운데 여당의 대선 후보로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장관이 최종 선출되는 과정에서 히든 카드 성격의 한덕수 총리가 등장한 사건도 있었다. 이후 새벽에 벌어진 전대미문의 후보 교체 사건으로 순식간에 그 흥행성도 사라졌으며 그의 50여 년의 공직 생활의 공적 또한 송두리째 평가절하 되고야 말았다.
사실 오래전부터 ‘한국 정치판은 3급수’라 했던가. 그 말처럼 정치판은 이제 국가의 미래를 걸고 미래를 이끌어 갈 가장 우수한 인재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발휘하는 곳이 아니라 그저 개인의 이익만을 목적으로 ‘이합집산(離合集散)’하는 곳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물론 정치란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만들어진 사자성어 ‘합종연횡(合縱連橫)’이 난무하는 곳이지만 그리 생각하기에도 한국 정치는 이미 그 선(線)을 넘어도 너무 넘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닌, 마치 메타버스 속 여의도라는 무형의 ‘갈라파고스 섬’에서 정치인과 정치인이 되고 싶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뒤엉켜 이제는 ‘정당의 정체성’은 물론 ‘정치인들의 사명감이나 국가관’조차 이해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당내에서 경선을 통해 선출된 당선인을 새벽에 교체하며 스스로 민주주의를 파괴한 보수 정당, 그렇다고 지지하던 정당을 버리고 갑자기 경쟁 당을 지지하고 나선 사람들에게 과연 이 나라 대한민국은 어떠한 존재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은 건국 정신과 국가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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