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을 규정짓는 중요한 특징은 장기적 계약을 통해 집단을 형성하고 유지한다는 점이다. 모든 동물이 무리 생활의 생존적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는데, 유독 인간은 무리의 방식과 규모를 다양화했다. 그리고 무리에 따라 독특한 생활양식, 즉 문화를 일구어 냈다. 지구촌이 확장되면서 서구적 생활로 통일되는 듯 보이지만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부족 단위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1992년 12월 유엔(UN·국제연합) 총회는 1993년을 세계 원주민의 국제년으로 지정했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약 5억 명의 원주민이 7000여 개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세계 90개국에 걸쳐 살고 있다. 그들의 전통문화는 5000개에 달한다. 1992년 12월엔 과테말라의 원주민 아가씨가 구술한 내용이 책으로 엮여 출간되기도 했다.
1992년 1월 초, 파리의 한 인류학자의 집에 기거하면서 25시간 분량의 사연을 서투른 스페인어로 구술한 이 아가씨는 당시 23세의 리고베르타 멘츄 툼이었다. 지독히도 추운 겨울날 맨발에 외투도 걸치지 않고 부족 고유의 의상을 입은 이 아가씨의 이야기는 인류학자 엘리자베스 부르고스의 애정어린 노력으로 같은 해에 책으로 나왔다.
이 책으로 과테말라 원주민의 참혹한 삶이 세상에 드러났다. 지구촌 원주민의 수는 세계 인구의 5%이고 극빈층 인구의 15%를 차지한다. 하지만 문제는 가난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보장받지 못하는 점이다. 과테말라 인구의 약 70%에 달하는 원주민 인디헤나는 1978년부터 루카스 가르시아 정부의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이 폭압의 의도는 원주민에게서 토지를 박탈하려는 것이었다. 혼혈인 라디노 농장주에 의해 가축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던 원주민들은 조상 때부터 터 잡고 살던 땅에서 그나마 위안을 누리며 태양과 식물·동물과 더불어 생을 이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조직적이고 비인도적인 원주민 학살이 덮치면서 기본적인 생명권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주들은 정부와 한통속이 되어 농민들에게서 토지를 빼앗았고 리고베르타의 가족도 1967년부터 집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주들에 맞서 22년간 물러서지 않고 투쟁했다. 문제는 언어였다. 과테말라의 22개 부족은 서로 언어가 달라서 하나로 뭉칠 수 없었다. 과테말라의 공용어는 스페인어였고 인디헤나들은 스페인어에 무지했다. 각각의 부족은 작고 단단한 공동체를 가지고 살았지만 모든 부족을 하나로 연합할 방법은 없었다.
리고베르타 멘츄 툼은 과테말라 퀴체족의 일원이며 아버지는 족장이었다. 퀴체족은 땅을 빼앗으려는 정부의 무력에 저항했다. 리고베르타의 가족 전원은 투사가 되었고 각 지역을 다니면서 다른 부족들에게 생존권 수호를 위해 연합하는 의식화를 담당했다. 그 과정에서 남동생이 혹독한 고문을 거쳐 산 채로 화형을 당하고 어머니와 아버지도 끔찍한 죽임을 당했다. 어머니의 시체는 산짐승들에 의해 뼛조각 하나까지 훼손되었다.
2년에 걸쳐 일어난 이 비극은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기로 결정한 리고베르타의 가족이 각오한 일이었다. 리고베르타는 과테말라시티의 한 수녀원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스페인어를 익혔다. 그녀는 1981년에 멕시코로 망명해 사무엘 루이스 가르시아 주교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과테말라 원주민의 참담한 실상을 폭로하는 일을 시작했다. 리고베르타는 유럽에 도착했고 이후 ‘나, 리고베르타 멘츄’가 출간된다. 그런데 이 책에는 과테말라 원주민의 참혹한 삶만이 담긴 게 아니었다. 오히려 마야 문명의 계승자, 태양신의 후예인 원주민의 자부심과 사상·관습·풍습이 책 내용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임산부에 대한 경의가 깃든 보호, 신의 아이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아이인 신생아 환영 의식, 나무를 베고서 용서를 비는 생태적 사고의 기원, 아이들이 자연을 유린하지 않고 경배하도록 하는 가정교육 등이 당당하고 담담하게 소개되어 있다.
이 책에 힘입어 리고베르타는 199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고 노벨상 상금으로 ‘비센테 멘츄 툼’ 재단을 만들었다.
WHO가 밝혔듯이 지구촌에 산재하는 원주민 공동체는 다양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소중히 간직해 오고 있다. 특히 자연에서 유래하는 전통 의술에 관한 지식 정보를 보존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도시화와 현대화는 가족을 잘게 쪼개어 놓고 있다. 핵가족도 모자라 1인 가족이 늘어나는 추세다. 가족은 점점 왜소해지고 사람들은 분리되어 외로움에 노출되어 있다. 태초의 풍경을 떠올리면 인간은 대자연 가족의 일원이었다. 그 안에는 동물도 식물도 무생물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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