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순은 건대 애학투련 사태에서 도피하지 못하고 경찰에 연행되었다. 무려 105명의 한신대생이 연행됐다. 집회에서 연행된 학생 수는 건국대를 제외하고 서울대에 이어 두 번째였다.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한 학생이 있었고 경찰서로 연행된 학생 대부분이 경찰의 무자비한 폭행에 속수무책이었다. 기순도 과 대표 선희도 곤봉으로 수차례 맞았다. 조사 결과 전과가 없고 시위 전력도 없어서 훈방으로 풀려나긴 했는데 온몸은 멍투성이였다.
과 대표 박선희는 집에서 알고 난리가 났다. 그녀는 건대 사건 이후 다신 운동권에 발을 들이지 않았고 졸업 후 동기 중에서 가장 먼저 결혼했다. 기순이는 달랐다. 건대 사건 이후 눈빛은 더욱 강렬해지고 의지는 갈수록 공고해졌다. 승연은 기순의 변신이 자기 탓 같아 가슴 아팠다. 여름방학에 영어학원 같이 다니자고 꼬드기고, 김태주가 보고 싶어 농반 활동하자고 또 꼬드겨서 결국 팔자에 없는 투사가 된 것 아닌가 자책했다. 오히려 “진실에 눈뜨게 되어 고맙다”는 기순이 비장한 눈빛으로 승연의 손을 잡았을 땐 알 수 없는 전율까지 느꼈다. 사람의 인생이 어느 장소, 어느 시간, 누구와 있었는가에 달라질 수 있다는 평범한 작동을 기순은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왜 수정이한테 쓸데없는 얘길 했냐고요! 굳이 수십 년 지난 내용을 왜 수정이가 알아야 하냐고!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감추어 왔던 과거의 기억은 분노를 불러냈다. 그 악몽 지우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리셋하며 살아왔는지 강윤희가 안다면 그래선 안 됐다.
“고대생이었던가…, 3학년 남자 선배가 여성해방은 여성 스스로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갖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라고, 그래서 여자는 먼저 성적 수치심부터 깰 필요가 있다고, 용감하게 누가 웃옷 벗고 브래지어도 벗을 거냐고 물었지. 누구도 반항할 분위기가 아니었어. 한 방에 남자들 스무 명이 둘러싸고 있었는데 여잔 고작 네댓 명이었고. 영문과 여자가 먼저 셔츠를 벗고 브래지어를 벗었지. 용감하다며 남자들이 박수치고….” 강윤희는 잠깐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어 갔다.
“다음으로 이지은, 이정희가 벗었고. 차례차례 손뼉 쳤지. 내 차례가 돼서 윗도리를 벗으려 하자, 여성해방 어쩌구 했던 3학년 그 새끼가 그만 됐다면서 앞으로 여성 동지들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여성이라는 피해자 의식에서 벗어나길 바란다고 했지.
승연 씨가 벗을 차례였는데 그걸 막은 거야, 그 새끼가. 승연 씨 가슴을 여러 명이 보는 게 싫었던 거야. 그 새끼한테 내가 물어봤거든 왜 내 차례에서 멈추게 했냐, 나도 하고 오승연도 해야지. 우리의 사상성, 투쟁성은 검증 안 하냐고 그랬더니 그 자식이 뭐라 했는지 알아? 강윤희는 안 벗어도 이미 사상성이 충분히 검증됐다고. 그 새끼, 김태주만 없었으면 오승연 따먹으려 무슨 수라도 썼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닌 놈이야. 예쁜 신입만 들어오면 서로 따먹으려 별 구실을 다 붙여서 전전긍긍하는 것들이 나한테는 어떤 구실도 붙이지 않더라고.”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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