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 선배님, 갑자기 찾아온 완연한 봄날 오랜만에 만나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강릉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서울로 복귀하신 것 환영합니다. 집들이를 위해 주문진에서 공수해 온 신선한 생선회에 화이트 와인, 그리고 배경음악으로 깔린 브람스의 ‘인터메쪼’까지…. 모처럼 오랜 지인들과 여유 있게 호사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잠깐 즐겁고 유쾌한 분위기가 갑자기 얼어붙었던 순간, 기억하시지요? 요즘 시국에 관한 것으로 화제가 옮아갔을 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헌법재판소가 만일 기각이나 각하 결정을 내린다면 재판관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지레 분노를 터뜨리며 말하는 선배 모습을 보고 말입니다. 물론 사실은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현 대신에 훨씬 더 극단적인 표현을 썼지요. 그러면서 ‘당사자는 물론이고!’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제가 놀란 것은 평소 그렇게 온화하고 부드러운 선배의 입에서 극렬한 표현이 나와서가 아닙니다. 학생 시절 제가 가까이서는 보지 못했지만 늘 정치적·사회적 부조리와 불의를 지적하고 저항해 온 선배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거에 그런 과정 속에서 어느 새 굳어진 ‘좌파=정의’라는 등식의 오류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놀라웠던 겁니다. 다행인 것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선배 의견에 동조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죠. 누군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만회하려 음악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던 게 기억납니다.
젊은 시절 선배는 이 사회의 불공정함을 직시하고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우려 했던 강한 의지를 가진 분이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상은 변했습니다. 과거 거리에서 정의를 외치던 좌파들은 이제 국회에 들어가 다수 권력이 되어 무소불위의 칼을 휘두르며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체제에 심각한 혼란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선배를 비롯해 좌파는 정의의 편이라고 무조건 믿는 사람이 많은 것은 어째서일까요?
헌법재판소가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을 다루고 있는 지금, 온 국민의 눈과 귀는 헌재에 쏠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저 습관적으로 봐 왔던 TV 채널의 편향된 보도에만 자신들의 판단력을 의존하고 있는 국민이 여전히 많습니다. 이제는 국민 스스로 그들이 믿어 온 미디어의 보도가 과연 ‘공정함’을 보장해 왔는지 물어야 합니다.
특히, 소위 ‘레거시 미디어’의 보도에서 드러나는 지나친 편향성은 이제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선배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과거 자신이 신뢰했던 미디어에 지속적으로 의존하고 그 미디어에서 전하는 정보를 ‘진실’로 믿는 관성 속에서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래전에 봤던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에서 주인공 빌이 경험한 세계는 과연 현실일까요 환상일까요?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아내 앨리스의 과거 고백에 의해 자신 내면의 성적 욕망과 불안에 눈뜨게 된 빌은 비밀스러운 성적 모임에 초대되는 경험을 합니다. 하지만 빌의 경험이 사실인지 아니면 그의 환상인지 빌도 관객도 구분할 수 없습니다. 다만 ‘눈을 크게 뜨고 있지만 닫혀 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영화 제목에서 우리는 그 답을 유추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진실을 외면한 채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 보려는 인간의 심리적 상태를 나타내는 제목이지만, 이는 우리의 정치적·사회적 문제에 대해 관성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부 국민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특히 지식인으로 살아오면서 사회 문제에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시선을 유지해 왔다고 자부하지만 사실은 ‘진실을 보지 못한 채 닫혀 버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부류라는 생각입니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은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는 겁니다. 그들이 믿었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정의롭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이를 똑바로 바라보려 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지금까지 믿고 추종했던 정치적 진영에서 벗어나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믿어 왔던 모든 것이 거짓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늘 존경해 왔던 선배의 지혜를 믿습니다. 지금 드러나고 있는 진실은 결국 많은 사람을 눈뜨게 만들 것입니다. 일례로 과거에는 ‘음모론’으로 치부되던 부정선거 의혹을 비롯해 윤 대통령의 ‘계몽령’에 의해 많은 사실이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선배에게 필요한 건 그 진실을 마주하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제대로 바라보겠다는 용기입니다. 그간 선배가 추구해 왔던 정의의 길을 가로막는 바리케이드는 늘 그랬듯이 ‘용기’로써 돌파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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