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㉛ 충정작전 투입 장병 手記 ‘진실의 반전’
[단독: 5·18 진실 찾기] <31>“폭도 총 맞아 죽나”… 공포에 떤 계엄군
“마약하고 광주시민 몰살 나섰다”는 악의적 선전과는 딴 판
광주체육관 고립 장병들 ‘지옥체험’… “이게 민주화 투쟁이냐”
“44년 학살자로 일방 매도된 현실 억울… 이젠 풀어야 한다”
허겸 기자 기자페이지 + 입력 2024-03-20 00:05:00
 
▲ 1980년 5·18 당시 무장폭도들에게 포위돼 고립된 채로 죽음의 공포에 떨었던 1118야전공병단 185공병대대 2중대 이○○ 상병은 자필 체험수기에서 “군인들이 버젓이 이렇게 있는데 저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날뛴다는 것은 군인들이 너무나 온순하게 그리고 무기력하게 군중들에게 대한 결과”라며 “더군다나 간첩들의 침입 경로가 다분히 있는 남해안 도서지방에 혼란한 틈을 이용해 북괴가 남침 또는 무장간첩을 남파하면 이건 정말 큰일이어서 울화통이 터졌다”고 분노했다. 그러면서 “누가 정말 애국자며 민주주의 선봉자인가”라고 물었고 말로만 애국하는 얄팍한 애국심에 대해선 “정말 총으로 쏴 갈기고 싶었다”고 격앙된 감정을 애써 감추지 않았다.
 
1980년 5·18 당시 총·칼·낫·곡괭이를 든 무장폭도들에게 포위된 채 죽음의 공포에 떨었던 계엄군 장병들의 자필 수기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44년간 학살자로 매도돼 온 계엄군의 이미지와 큰 괴리를 낳아 사건의 실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근 스카이데일리와 민간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민진사)는 폭도들의 무장공격으로 공포에 직면한 장병들이 죽음을 넘나드는 사선에서 생존을 갈망하는 한 인간으로서 고뇌와 애환·절규를 상세하게 기록한 장병 체험수기 ‘광주사태 진압을 위한 충정작전 체험담’을 단독 입수했다. 
 
‘피해자 계엄군’ 관점 장병 자필수기 44년 만에 공개돼 
 
장병들은 군인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과 무장해제 당한 치욕감, 광주가 고향인 동향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과 허무함, 주민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폭동 현장을 탈출한 안도감과 한없이 밀려드는 패배감 등을 수기에 절절하게 담아냈다. 대(對) 정부 무장봉기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했던 현장 목격자들의 굴절되지 않고 왜곡되지 않은 원전 기록이다. 
 
▲ 빛바랜 충정작전 투입 장병 手記.
이 때문에 계엄군의 탄식과 비애가 기록된 수기는 가히 ‘반전’이라 불릴 만 하다. 신군부 집권시나리오에 따라 계엄군이 마약까지 흡입하고 광주시민을 학살하는 데 혈안이 됐다는 일각의 주장과 딴 판이었다. 지독한 공포를 억누르며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광주 출신 장병의 애틋한 체험담은 읽는 이에게 가슴 먹먹한 고통을 느끼게 한다. 
 
장병들의 수기 속엔 3㎞ 가까이에 있는 부대로 복귀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목포 부근의 다른 부대까지 68㎞를 도주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장병들은 ‘밤만 되면 폭도로 돌변하는 그들’ ‘군인들이 버젓이 있는데 저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날뛰는 건 군인들이 너무나 온순하고 무기력했기 때문’ ‘간첩들의 침입 경로가 다분히 있는 남해안 도서지방에서 혼란을 틈타 북괴가 남침 또는 무장간첩을 남파할까 울화통이 터졌다’ ‘누가 정말 애국자이며 민주주의 선봉자인가?’라고 거침없는 분노를 쏟아냈다. 
  
▲ 1118야전공병단 185공병대대 소속 조○○ 2중대장은 수기에서 “폭도들이 월남전에서 베트콩과 다를 바 없이 행동을 하더라는 연대장의 말씀이 머리에 생생하게 남는다”고 적었다.
 
‘월남전에서 베트콩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더라’는 박동조 31사단 96연대장의 간접 증언도 기록됐다. 박 대령은 파월 장병으로 알려졌다. 이는 김대중 당시 국민연합 공동의장의 선동 발언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1980년 5·18 발생 일주일 전인 5월11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월남식으로 국민 속에 침투해 도시게릴라 농촌게릴라전을 하라”고 대중 선동했고 군인의 정부 명령 불복종을 촉구했다. 1981년 최초 대법원 판결은 김대중이 “반(反)정부 봉기 의식을 고취했다”고 판단해 사형을 언도했다. 군 전문가들은 실제 5·18에서 도시 게릴라전의 형태가 나타난 것으로 분석한다. <본지 2024년 2월8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30>“게릴라戰 나서라” 무장투쟁 부추긴 김대중 보도 참조> 
 
볼펜으로 꼭꼭 눌러쓴 장병들의 수기를 보면 과연 독재정권의 폭력에 맞서 자유를 외쳤다는 민주화운동 세력의 주장이 사실일까 충분히 의구심을 갖게 한다. 장병 체험 수기의 발견은 역사적 실재(實在)보다 두려운 것은 인간의 망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간의 5·18 역사는 정치적 해석으로 점철된 가운데 은폐와 망각의 궤적만 오롯이 그려왔다는 반박이 어렵지 않아 보인다. 
 
은폐와 망각의 세월 44년… 정치적 유불리 안 따진 ‘비극의 현장’ 목격담 
 
수기집은 31사단에 배속·편성돼 광주 시내에 주둔한 1118야전공병단(야공단) 185공병대대(대대장 이명재 중령)가 진압부대로 출동해 폭도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복귀한 1980년 5월18일부터 23일까지 남광주지역의 진압작전 시 단면을 적나라하게 기록한다. 당시 이명재 대대장이 이례적으로 작성을 지시한 뒤 장병들로부터 수거해 유구한 세월을 원본 그대로 보관한 덕분에 44년 만에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 185대대 김○○ 상병은 5월18일 계엄군으로서 모교인 조선대에 출동한 심정을 기술했다.
  
185대대 2중대 김○○ 상병은 5월18일 계엄군으로서 모교인 조선대에 출동한 심정을 기술했다. 그는 “우리는 말로만 듣던 폭동에 대해 실제로 참상을 볼 수 있었다… (중략) …조선대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오면서 폭도들이 남겨 놓은 참혹한 현장을 목격했고 울분을 참지 못했다”며 “8년간 진리를 탐구했던 정들은 모교에 군인이 주둔하기 위해 말뚝을 박고 돌아온 나의 마음은 쓰라렸고 억울하기만 했다. 이제 내가 군인이었고 명령이니만큼 그리고 폭도들의 진압을 막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겠지. 이보다 더한 것이라도 할 수 있다며 자신을 달래 보았다”고 수기에 적었다. 
 
장병들의 수기는 정치적 유불리에 따른 자의적 해석을 배제하고 5·18 비극의 현장을 어떤 기교도 부리지 않은 채, 직접 눈으로 본 그대로 적어 내려갔다. 
 
▲ 사수지역 광주대교. ©스카이데일리
2중대 홍○○ 병장은 추적추적 부슬비가 내리는 20일 새벽 3시쯤 잠에서 깨 어둠을 가르며 광주 시내로 출동하며 목격한 참상의 기억을 기록했다. 홍 병장은 “가로변의 화분대가 차선에 어지럽게 부서져 난장판을 이뤘고 벽돌 조각·돌·쓰레기 등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며 “그런가 하면 광주고속터미널 앞에는 많은 차량이 불에 타 있었고 인근 상가에서 폭도들이 집어 던진 플라스틱 제품이 부서져 있었으며 거리는 온통 글자 그대로 수라장을 이뤘다”고 기록했다. 박○○ 병장은 “사람이 없는 (새벽) 빈 거리는 완전 폐허가 되다시피 너무도 비참했다”며 “얼마나 심한 데모·폭동·난리였었나 그 거리를 볼 때 그들이 행동하는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고 했다. 또한 낮에는 “광주 충장로에서 계속해서 폭동 사태가 벌어지는 광경이 멀리나마 보였고 우리 뒤에 몰려오면 함락돼 목숨까지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며 “낮에만 해도 조용했던 시민이 밤에는 이 모양이다. 화가 난다고 성질대로 하면 군인으로서 수치라 하겠다”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박 병장은 이어 “피해를 줄이기 위해 몸과 정신력으로 싸우기 때문에 마음을 놓고 덤벼온다. 그러기에 군인들이 피해를 많이 입는 것”이라고 수기에 적어 대민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작전 형태를 엿보게 했다. 
 
2중대장 조○○ 대위는 19일 자정 연대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수기로 남겼다. 그는 “우리는 24시00분 명령 수령 관계로 연대장실에 집합해 소요 사태의 전반적인 사항을 들었다”며 “그중 머리에 생생하게 남는 것이 월남전에서 베트콩과 다를 바 없이 행동하더라는 말씀이었다”고 썼다. 조 대위는 이튿날 “광주대교의 통행을 차단하기에 이르렀는데 사태는 이때부터 조금 심각해지기 시작했다”며 “해산한 군중이 광주공원에 화염병을 들고 이동한다는 무전 보고를 입수했는데 지금에 와서 판단해 보니 과격파가 있었다는 느낌이 든다”고 수기에 적었다. 
 
▲ 185공병대대가 사수하려 했던 광주교. 광주실내체육관 맞은편에 자리해 있다. ©스카이데일리
  
▲ 계엄군을 걱정한 시민들에 관한 기록.
광주 출신의 2중대 무전병 김○준 상병은 19일 “대대장님으로부터 광주 MBC방송국이 폭도들에 의해 방화됐다는 상황 설명을 들었다”며 “광주가 고향인 나로서는 시내 상황이 걱정됐으나 우리가 출동하면 능히 해결할 수 있으리라 자위하며 잠을 청했다”고 적었다. 20일에는 “16시(오후 4시)경 설득으로 군중을 해산시키는 방법을 모색하며 중대장이 설득에 들어갔다”며 “인파는 많이 해산됐으나 일부 과격한 흥분 상태의 시민들은 뒤로 후퇴해 군중들을 선동하고 있었다”고 목격담을 기술했다. 그러곤 “식사는 했냐며 걱정하는 시민들이 있었는데 구동 동회장님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덧붙였다. 
 
“고향에서 고향 주민들에 의해 죽는다면 억울한 일 아닌가” 
 
야공단의 공포는 이날 밤 극한으로 치닫는다. 앞서 20일 이른 새벽 4시30분 광주천의 4개 교량을 통제했던 장병들은 범람하는 강물처럼 불어나는 폭도들에 밀려 광주 실내체육관으로 철수한 날 밤 시위대가 방화하지 않을지 공포감에 시달리다 21일 아침 체육관을 탈출하기로 한다. 
 
▲ 체육관 폭파 첩보가 적힌 조 대위 수기.
조 대위는 20일 밤 “버스에 승차하기 전까지만 해도 주위의 분위기가 험악해진 줄 몰랐다. (중략) 군중들은 꽉 차 있으면서 체육관 진입을 방해하려 했다. 이때부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감에 대대장님 이하 간부 및 병사들은 휩싸이게 됐다”며 “시간이 가면 갈수록 폭도들의 시위는 점점 더해져 가며 실내의 전화벨 소리, 밖의 폭도들의 외침·만행, 어두운 밤을 대낮처럼 밝게 하는 방화 행위·횃불 시위, 이 모두가 사태의 심각성과 우리 간부들에게 점점 공포의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는 요소들“이라고 수기에 적었다. 
 
사병들도 똑같은 공포감을 느꼈다. 김○구 상병과 또 다른 병사는 “통금 시간인 21시(오후 9시)가 지났는데도 폭도들은 광주공원 앞에 운집해 구호를 외치며 기름을 끼얹어가며 방화를 했다”고 썼다. 구체적으로 “석유를 뿌리고 전국체전전남예선대회라는 탑을 불태워 가슴 아파 어쩔 줄 몰랐다”고 설명했다. 
 
▲ “폭도들이 기름을 끼얹어가며 방화했다“는 장병의 체험 수기.
 
총성이 멎기를 간절히 바라며 폭도에 포위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장병의 이야기도 있었다. 2중대 김○구 상병은 “새벽 2시. 갑자기 허공을 가르는 M60의 사격 소리에 잠이 깨었다. 시내 일각에선 화염이 계속 치솟고 있었으며 폭도들의 고함과 구호 소리는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한다”며 “나는 이 사태가 빨리 수습돼 나의 고향인 광주가 더 이상 파괴와 방화, 살육으로부터 벗어나길 하느님께 기도드렸다”고 슬픔을 달랬다. 그러고는 “제발 나의 전우·동생·형제들은 폭도의 무리와 합세하지 않기를 바라며 억지로 잠을 청했으나 잠은 오지 않고 두 눈은 더욱 초롱초롱해진다”고 수기에 적었다. 
 
한 병사는 폭도들이 공격해 오면 목숨을 버릴 각오로 맞서야 한다는 심경을 기술했다. 그는 “폭도들의 함성, 그리고 멀리 보이는 화염만이 우리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전부였다”며 “체육관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폭도들이 우릴 공격하면 생명을 버릴 결의를 다지며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고 했다. 홍○○ 병장은 “군중들이 마치 거센 파도처럼 움직이기 시작해 ‘폭도들은 해산하라’ ‘주민들과 시민들은 귀가하십시오’ 확성기로 수없이 외쳤으나 그들은 해산할 줄을 몰랐다”며 “밖에서는 아치를 불태우고 있었고 돌아와 잠을 청했지만 온종일 비를 맞은 탓인지 추워서 도무지 잘 수가 없었다”고 적었다. 
 
▲ 온종일 비를 맞은 탓인지 추워서 잘 수가 없었다는 장병의 수기.
  
김○○ 상병도 “날이 새도록 폭도들의 합성은 짙어지고 대대장님과 중대장님 그리고 참모진 모두 잠을 자지 않는 것 같았다”며 “몸에 냉기가 돌아 도무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고 기술했다. 
 
이들이 주둔한 광주 실내체육관은 1965년 건설돼 2008년 철거됐다. 지금은 그 자리에 빛고을시민문화관이 들어섰다. 5월20일부터 21일 아침까지 밤사이 체육관은 폭도들에게 온전히 둘러싸였고 계엄군은 군사학적으로 완전하게 포위됐다. 
 
▲ 광주실내체육관(작은 사진)이 2008년 철거된 자리에는 빛고을시민문화관이 들어서 있다. 남충수 기자 ©스카이데일리
 
일각에선 계엄군의 폭력성을 가슴에 새겨 두길 바라지만, 수기집을 읽다 보면 도리어 시위대 내부의 집단적 광기와 그것이 악한 본능임을 방증하는 광경이 더 또렷하게 그려진다. 
 
고향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죽는 끔찍한 상황을 걱정한 수기도 있었다. 김모 상병은 수기에서 “만약 이 장소를 우리가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폭도들에 의해 희생되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군인으로서 값진 죽음, 즉 북괴의 잔적들을 소탕하다 죽는다면 영광으로 후회는 없겠으나 만약 이곳에서 폭도들에 의해 죽는다면 그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더구나 내 고향에서 내 고향 주민들에 의해 죽는다면 그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라고 기록돼 있다. 
 
▲ 고향 사람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걱정한 광주 출신 계엄군의 수기.
 
“베트콩과 다를 바 없는 폭도 만행”… 연대장도 치 떨어 
 
 
 
 
 
 
 
 
 
“탈출… 불 타 죽거나 낫·삽·곡괭이·칼로 찢겨 죽는 일 모면” 
 
5월21일 아침 불과 하루 반 만에 폭동의 양상은 180도 달라졌고 야공단은 살기 위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다. 폭도들에게 둘러싸인 체육관 철문이 열리면서 앰뷸런스·2호차·버스·1호차·군용트럭이 순차적으로 포위망을 뚫고 월산동파출소가 있는 서쪽 방면으로 질주했다. 
 
 
조 대위(2중대장)는 “불에 타 죽을 일과 굶어 죽는 일 아니면 폭도들에게 끌려가 총을 빼앗기고 농기구인 낫·삽·곡괭이와 칼로 찢겨 죽는 일로부터 우선은 모면했다는 생각이 머리에 스쳐 간다”고 썼다. 김 상병은 “월산동파출소가 불에 타 있는 것을 보고 쓰라림을 맛보았다”고 심경을 전했다. 
 
▲ 불 타는 월산동 파출소를 목격한 장병의 체험 수기(위). 취재진과 최종원·김덕수 민진사 위원은 지난달 16일 5·18 당시 185공병대대가 탈출한 이동경로를 답사하면서 월산동 파출소가 있던 터(아래 왼쪽 사진 붉은원)를 발견했다. 아래 오른쪽은 확대한 사진.
 
오전 8시30분쯤 체육관에서 차로 2~3분 거리에 있는 월산동파출소가 불에 탄 모습을 목격하며 야공단 병력이 탄 차량이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를 향해 내달렸다. 이 시각은 ‘군분교 20사단 지휘차량 피탈’ 사건이 일어난 시각(오전 8시10분)으로부터 약 30분 흐른 시점이다. <본지 2023년 7월26일자 [단독: 5·18 진실 찾기⑦] ‘군분교 습격’은 외부세력 개입한 군사작전 보도 참조>
 
야공단은 철수 이동 중 돌고개에서 운집한 시위대와 맞닥뜨렸다. 시위대는 돌멩이를 투척하고 삽과 곡괭이로 차를 두들겼고 오전 8시50분쯤 공단입구에서는 불타는 차량과 바리케이드 장애물, 병력이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만큼의 시위대 인파와 봉착했다. 오전 9시 M16을 소지하고 군용 지프차를 운전하는 시위대가 처음 목격됐다. 야공단은 이들을 앞에 두고 좌회전한 뒤 백운동 철도 건널목의 장애물을 강행 돌파했다. 
 
김 상병은 당시 눈에 들어온 상황을 기억을 더듬어 상세하게 묘사했다. 그는 “돌고개에 올라서서 부대방향으로 이동하는데 길 복판에 폭도들이 가로수를 꺾어 바리케이드를 쳐 두었다. 끝은 겨우 차량 1대가 통행할 정도였다. 광송도로를 이동하는 중 공무원교육원쯤 왔을 때 폭도들을 실은 동양고속버스가 반대 방향에서 오다가 우릴 보고 ‘죽여라’ 하면서 차를 돌려 추격했다”고 상술했다. 다른 김○○ 상병도 “폭도들은 미리 준비해 온 휘발유병과 폭약 뭉치를 차내에 던지려 애써 보였고 군용 지프차를 빼앗아 타고서 추월해 왔다”고 묘사했다. 
 
▲ 폭도들이 추격전을 펼치며 화염병과 폭약뭉치를 던지려 했다는 증언이 담긴 장병의 자필 체험 수기.
 
불운하게도 2호 차량은 폭도들이 탄 버스에 들이받혀 길섶으로 올라섰다. 무전병 김 상병은 다시 “폭도의 버스가 2호차를 길 쪽으로 받아넘긴 뒤 탈취한 지프를 타고 M16 소총으로 무장한 폭도들이 우릴 공격할 기세였다”며 “선두의 앰뷸런스는 공단 입구에서 커다란 바리케이드를 만나 논두렁으로 처박혔으며 2호차는 버스에 밀려 인도로 튀어 올랐다가 겨우 방향을 잡아 도망하였으나 고속버스는 계속 추격했다“고 수기에 적었다. 
 
“광주 빠져나오며 수많은 치욕… 죽든 살든 박살 내고 싶었다” 
 
▲ 2중대 박○○ 병장은 “꼭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고 비유했다.
 
이 상황을 2중대 박○○ 병장은 “꼭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고 비유했다. 박 병장은 “계속해서 돌이 날아온다. 전원이 흥분 상태에 들어섰다. 군 지프차를 4대씩이나 타고 거리를 누비며 우리를 보고 멈추라 한다”고 위협받은 순간의 기억을 전했다. 그러면서 “그때 같으면 우리에게 총알이 있었다면 아마도 총을 쏘고 했을 것”이라며 “폭도들의 고속버스가 커브를 꺾으며 의무차를 길가로 밀어붙였다”고 묘사했다. 
 
▲ 폭도 버스의 추격을 받았다는 체험 수기
탈출 병력은 1진과 2진으로 나뉘었다. 이들은 공단 입구에서 방향이 갈린다. 2중대장이 탄 차량은 “좌로!”라는 외침과 함께 핸들을 꺾어 백운동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조 대위는 “뒤에는 바로 폭도들이 지프차를 타고 손에는 화염병·삽·낫을 들고 버스 옆에서 따라오면서 화염병을 던지고 양쪽 길에서는 돌멩이가 날아와 유리창이 깨어지면서 우리 차 안에서도 가스탄(M7A3최루탄)을 지프차에 2발을 던져 명중이 되니까 폭도의 차는 옆으로 빠져 따돌렸다“고 회고했다. 
 
백운동 철도 건널목 앞에는 차량이 검은 연기를 뿜으며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 대위는 “폭도들이 건널목을 봉쇄하고 있었는데 난 ‘무조건 통과’하고 외쳤고 운전병은 경적을 울리며 바리케이드를 지나고 중대원은 개스탄을 수없이 던지며 그 건널목을 통과했다”고 했다. 
 
▲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바리케이드를 강행 돌파한 과정을 설명하는 체험 수기.
 
철도 건널목엔 직경 50cm 정도의 검은 주철 파이프가 바리케이트로 쳐져 있었다고 이들은 증언했다. 차량이 빠져나갈 공간은 없고 파이프가 짧아 도로를 완전히 봉쇄하지 못하고 있을 뿐 1m 정도의 간격이 남은 유일한 통로였다는 것이다. 차량 동승병은 “운전병이 과감하게 차를 몰더니 남은 공간으로 바퀴 하나를 빼고 한 바퀴는 파이프 위에 걸치고 겨우 통과할 수 있었다.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차량이 파이프를 통과하자 흩어진 주민들이 차에 돌을 던졌다”고 수기에 기록했다. 한 병사는 “맹목적으로 선동에 앞장선 주민들은 올바른 이성의 판단에 의해 폭도들을 지지하는가”라며 시민과 폭도를 구분해 수기에 적었다. 또한 “상부에서는 총기로 무장한 폭도들에게 최루탄을 유일한 무기로 지급하고 대처하라니… 우리들의 생명은 아무런 가치가 없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장병의 수기도 있었다. 정○○ 상병은 “날아온 주먹만 한 돌멩이에 의해 내가 앉아 있는 옆 유리창이 박살 나는 순간 유리 조각이 나의 얼굴에 튀었고 눈가에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며 “나는 눈가에 피를 훔쳐내며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뛰어내려 우리가 죽든 살든 한바탕 해서 그들을 박살 내고 싶었다”고 강한 분노를 표출했다. 박 병장은 “우리들은 막 욕을 하면서 죽이지 못해 억울한 마음을 먹었다. 왜! 우리가 광주를 빠져나오면서 수많은 치욕을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적기도 했다. 
 
▲ 공병대대 2중대 박○○ 병장은 “(폭도들을) 죽이지 못해 억울한 마음을 먹었다. 왜! 우리가 광주를 빠져나오면서 수많은 치욕을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수기에 썼다.
 
2중대 이○빈 상병은 “정말 아연실색했다. 군인들이 버젓이 이렇게 있는데 저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날뛴다는 것은 군인들이 너무나 온순하게 그리고 무기력하게 군중들에게 대한 결과라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그는 “더군다나 여기는 남해안 특히 도서지방이 많은데 간첩들의 침입 경로가 다분히 있는 지방에서 저렇게 날뛴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며 “이 혼란한 틈을 이용해서 북괴가 남침 또는 무장간첩을 남파하면 이건 정말 큰일이라고 생각해 울화통이 터졌다. 누가 정말 애국자며 민주주의 선봉잔가?”라고 분노했다. 그러면서 “난 폭도들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들 중에 정말 진정한 애국자가 있으면 손들라고. 그리고 길가다가 애국가나 태극기를 보았을 때 경청하거나 경례한 적이 있었냐고 말이다. 말로만 애국하는 얄팍한 애국심을 정말 총으로 쏴 갈기고 싶었다”고 했다. 
 
▲ 44년간 학살자로 매도돼온 계엄군의 이미지와는 전혀 딴 판인 계엄군의 모습이 묘사된 장병 체험 수기집이 공개돼 사건의 실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방위병들, 목포는 쑥대밭… 폭도들 주민에 가담하라 강요”
 
나주 방면으로 질주하던 1진은 군용차량을 만나 가까운 군부대를 물었다. 목포에 93연대가 있다는 답변을 듣고 그곳으로 다시 달렸다. 조 중대장은 “얼마 후 광주 방면에서 고속버스를 선두로 4대의 버스에 폭도들이 승차하고 군부대 앞을 지나는 것을 목격하고 사태가 점점 심각해짐을 직감할 수가 있었으며 공포감이 더욱 심해 갔다”며 “병사들을 안심시키고 난 후 연대 상황실에 대기하면서 상황을 파악하던 중 목포에도 폭도의 만행이 자행돼 방화와 파괴와 폭동이 시작됐다는 상황을 접수했다. 우리도 (93연대) 군수주임과 협조해 실탄을 개인당 60·48발 수령했다. 그동안 폭도들은 계속 광주~목포 간 도로를 왕래하면서 구호를 외침과 동시에 각종 유언비어를 퍼뜨리기에 바쁜 모양이다”라고 적었다. 
 
무전병 김 상병은 “우리는 광주~목포간의 도로를 봉쇄해 폭동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93연대 측에서 그것을 실행하지 않았다. 오전 10시30분 광주 방면에서 고속버스를 선두로 여러 대의 버스에 분승한 폭도들이 목포를 향해 93연대 정문 앞을 통과하는 걸 목격했다. 결국 폭도들에게 목포에서도 만행을 자행할 기회를 준 것”이라고 상부 판단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다. 
 
▲ 2중대장은 목포 93연대에 진입한 이후에도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수기에 적었다.
 
1진은 목포 앞바다에서 3분가량 떨어진 군부대에 안전하게 진입했다. 조 대위는 이튿날인 22일 “폭도들은 계속 부대 앞을 왕래하고 목포·강진·해남·나주·무안 등지에서는 총기·실탄이 피탈됐다는 소식만 계속 상황실에 접수가 됐다”며 “오후 4시경 도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에 따라 광주~목포 간에 도로를 봉쇄했지만 매복지점에서는 총성이 계속 울리고 사상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적었다. 
 
▲ 장병들은 도로 봉쇄를 제때 하지 않아 목포가 피해를 본 데 대해 현지 실정을 모르는 군 지휘부를 탓하기도 했다.
간밤에는 폭도들이 부대를 습격할 것이라는 첩보에 따라 경계근무를 섰다고 했다. 무전병은 “폭도들은 광목도로를 타고 계속 무기고와 경찰지서를 습격해 다수의 무기를 확보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현지 실정과 급변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탁상공론하는 자들을 욕했다. 하지만 군인은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하므로 나의 분개는 폭도들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 광주 가족의 안위를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른다”고 썼다. 그러곤 “아침이 되자 겨우 목포를 빠져나와 출근한 방위병들이 목포에서 벌어진 방화·약탈·파괴의 참상을 이야기해 줬다”며 “우리들이 부대에 도착했을 때 도로를 봉쇄했더라면 그런 참상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목포까지 피해를 보다니 억울한 일이다”고 밝혔다. 
 
2중대 이○빈 상병은 “출퇴근하는 방위들에 의하면 목포시는 쑥밭이 됐으며, 젊은이는 무조건 총을 주며 일에 가담하라고 강요했으며 주민들에게도 자기들이 지나가면 박수 치며 호응하라고 공포를 줬다고 했다“고 수기에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목포 93연대로 탈출한 185공병대대 1진은 23일 헬기편으로 전교사로 복귀한다. 2중대장은 이때의 심경을 “순간 얼마나 기뻤었는지 그때 당시 마음의 흥분을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다”며 “환송 나온 단장님, 대대장님, 단 참모님 그리고 중대원들을 봤을 때 이제 우리는 우리의 집에 왔구나 하는 생각에 이제까지 불안과 공포의 날이 계속되던 것이 평온한 안도감을 가슴에 안은 채 대대 연병장에 도착했다”고 마무리했다. 
 
▲ 이명재 185 공병대대장이 44년간 CD와 문서 형태로 보관해 온 계엄군 장병 수기집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살았단 기쁨 티끌도 없어… 실탄 없는 빈 총, 우린 군인 아니었다”
 
구사일생으로 현장을 빠져나간 1진의 걱정대로 공단 입구에서 전방으로 직진한 2진은 불운하게도 군분교 앞에서 탈출이 좌절됐다. 화정동의 폭도들은 장병들을 순식간에 에워쌌다. 이곳은 불과 한 시간 전 20사단 지휘부 차량 14대가 오도 가도 못하는 가운데 폭도들에게 무장 해제된 곳이었다. 공병단 2진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전병이 아닌 2중대 김○준 상병은 “돌고개를 넘어서는데 수많은 폭도와 시민들… 손을 흔들어 보기도 하고 우리는 여러분들을 악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손짓 몸짓으로 표현했지만 필요 없었다”며 “낫·삽·곡괭이·함마 등으로 모든 장비들을 마구 부수려 대들고 군용 지프차며 일반 차량이며 마구잡이로 빼앗는 것 같았다“고 수기에 적어 내려갔다. 
 
2진 소속의 3중대 신○○ 일병은 무장 해제된 수치스러운 기억을 수기에 적었다. 신 일병은 “군인으로서 폭도 앞에 손을 든 것을 수치스러움과 미약함을 절실히 느꼈다“고 기술했다. 그러면서 “광주폭동 사태는 규모가 상당히 크고 엄청난 사태라고 생각한다. 광주에서 근무하는 군인으로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폭동 진압대원으로서 진압에 참가해 보았지만 극소수의 불순분자로 인해 선량한 시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진압 전투대원으로서 폭도들에게 많은 공격과 피해를 봤다“고 감정을 억눌렀다. 
 
▲ 뒤쳐진 전우가 희생됐을지 모른다며 걱정하는 체험 수기.
 
3중대 우○○ 상병은 “우린 차를 빼앗기고 도보로 빠져나왔다. 폭도들은 군을 무기력하게 보았을 것”이라며 “그러나 생각은 오산이다.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북한 괴뢰 집단에 총부리를 겨눠야 할 우리 군으로서 어찌 그들의 가슴에 총을 겨눌 수가 있을까? 광주 시민들이여! 이 살기 좋은 한반도의 역사에 더러운 오점을 남기지 말고 더욱 자중해서 사태가 호전되도록 당부하고 싶을 뿐이다“라고 수기에 적었다. 
 
▲ 홍○○ 일병은 “차량 및 병기를 빼앗긴 것은 통탄할 노릇”이라며 “병기가 있어도 실탄이 없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군은 이미 발포명령이 내려졌어야 했다. 적어도 20일 저녁까지 말이다. 그렇게 됐다면 각 지역으로 분산되지 않았을 것이며 총기 내지는 실탄을 빼앗기지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원인을 분석하는 수기를 적어 제출했다.
 
실탄 없는 빈 총으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어렵고 살았다는 안도감조차 없었다는 기록도 발견됐다. 185대대 3중대 한○○ 병장은 “살았다는 것이 기쁜 것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군인이 시민들에 쫓겨 후퇴해야 한다는 군인의 수준에 아니 군인이라는 사명감에 눈에는 눈물이 몸은 어떤 초조함에 싸여 흔들리는 트럭에 기대어 있었다”며 “잿등 밑에서 도로가 차단된 데서 시민들의 돌멩이가 날아오고 군 트럭이 박살 날 때 죽기 아니면 살기다. 침착하게 냉정히 생각하고 행동하자는 것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실탄 없는 빈 총의 군인들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군인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이 모두가 머릿속에 상주해 있는 제대 날짜 때문일 것이다. 광주에 대해 좋은 인상을 받았던 나의 마음은 미련을 두지 말자고 마음속 깊이 다짐하며 골목길을 내달았다“고 광주에서 겪은 일을 잊고 싶다는 마음을 수기에 표현했다. 
 
▲ 스카이데일리 취재진과 최종원·김덕수 민진사 위원은 지난달 16일 5·18 당시 185공병대대가 탈출한 경로를 따라 목포 앞바다가 3분 거리에 있는 옛 93연대 부대 터가 있는 곳까지 답사했다. 광주~목포 고속도로에서 외진 경사로에 자리한 부대 입구에 바리케이드가 엇갈려 놓여 있다. ©스카이데일리
 
체험수기를 발굴한 계엄군 중대장 출신의 최종원 민진사 위원은 “국민을 지켜야 하는데 오히려 광주시민의 도움을 받아 탈출한 2진은 왜 상세한 체험을 쓸 수가 없었을까. 군인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과 굴욕으로 인해 창피했기 때문에 단지 몇 자만 적었을 뿐”이라며 “그들은 결코 광주시민들을 괴롭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죽여라” 영화같은 軍차량 추격전… 65km 필사의 대탈출 실탄 없는 빈총 들고 방화 위협에 체육관서 밤새 떨어 도로 곳곳 살벌한 바리케이드… 주위 군중들 투석 공격 광주~목포 도로 폭도들 제 세상인 듯… “박수쳐라” 윽박 軍지프·일반차까지 마구 뺏어… 자감에 군인들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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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하게   2025-01-17 19:39 수정          삭제 한강이 이 기사들을,이 사실들을 보아야 하는데.그 아버지 한승원도 함께 보아아하는데.오십팔사진첩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그리고 왜 대중들에게 공개하지않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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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여사   2024-03-27 06:08 수정          삭제 5.18은 진보와보수가모여서끝장을봐야합니다여태좌파끼리모여서.5.18의진실을 찾고있었으니 역사까지 뒤집는 파렴치한 짓을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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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ol1229   2024-03-20 15:52 수정          삭제 한동훈은 민주주의 개념도 모르는 애송이 주사파 독재자 기질이 많은 강남 좌파로 분류함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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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   2024-03-20 07:36 수정          삭제 허겸 기자,대단한 애국자입니다.5.18의 진실을 가린 채 5.18을 헌법수록한다고 헛소리만 지껄이는 한동훈은 꼭 읽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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