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봄날의 경험이다. 극장을 찾았지만 영화는 보지도 못한 채 발걸음을 되돌렸다. 영화관에 ‘볼 영화’가 단 한 편도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 3월과 4월, 극장을 찾은 관객들 사이에서도 “영화관에 가도 도대체 볼 영화가 없다”는 비슷한 말이 나왔다.
당시 대부분의 극장 상영관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 17’로 채워졌다. 단 한 편이 상영관을 거의 독점한 것이다.
미키 17은 한국인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지만 엄연히 외국 영화였다. 그러니 한동안 영화관에선 신작, 특히 국내 영화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던 셈이다.
미키 17은 당시 관객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영화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이 영화를 이미 관람했다면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그나마 소수 상영관에서 다른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지만 그 대다수가 과거 흥행에 성공했던 재개봉 영화들이었다. 그만큼 국내 창작 영화의 부재가 뚜렷했던 시기였다.
실제 데이터 상으로도 2024년 하반기부터 2025년 초까지 국내 상영작 수 기준으로 한국 영화의 비중은 20%대까지 감소했다. 이는 코로나19 대유행 이전 평균치인 45~50%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또한 4월 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 등 주요 극장에서 개봉된 한국 영화는 3편 미만이었으며 상영 횟수 점유율은 전체의 10%도 채 되지 않았다.
반면에 같은 시기 국내 창작 뮤지컬 시장은 활황이었다. ‘6시 퇴근’ ‘나의 연애코치’ ‘붉은 정원’ ‘사랑은 비를 타고’ 등 창작 기반 뮤지컬들이 연이어 무대에 오르며 공연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와 같은 영화와 공연 예술의 대조적 흐름은 국내 영상 콘텐츠 제작 환경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이렇게 독창적인 한국 토종 영화에 대한 관객의 갈증을 충분히 만족시키지 못한 잔인한 봄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최근 들어서는 흐름의 양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지난해 영화 ‘파묘’가 1174만의 관객을 동원하며 2024년 최고 흥행작으로 자리 잡은 데 이어 ‘시민 덕희’와 ‘탈출: 프로젝트 사일런스’ 등 다양한 장르의 한국 영화가 빠른 속도로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올해 역시 개봉된 영화 가운데 ‘히트맨2’ ‘검은 수녀들’ ‘승부’ ‘야당’ ‘하이파이브’가 기대 이상의 성적을 냈다.
그러나 이러한 반등이 일시적인 ‘반짝’ 성공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선 영화 제작·배급 시스템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재정비가 필요하다.
얼마 전 한 유명 해외 드라마 제작에 참여한 국내 감독은 현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영화 산업이 처한 현실과 제작 현장의 어려움을 정확히 지적하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대형 배급사 중심의 투자 구조와 불균형한 수익 분배 등으로 창작 환경이 안정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기에 코로나19 이후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확산으로 새로운 기회가 열린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콘텐츠가 한쪽으로 쏠리면서 국내 창작 영화는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그 결과가 바로 몇 달 전 영화관에 마땅히 볼 영화가 없었던 상황으로 이어진 것이다.
영화는 단순한 콘텐츠가 아니라 한 사회의 문화적 상상력이 투영되는 예술 작품이다. 그 상상력이 말라붙는다면 극장은 더 이상 관객이 아닌 빈 좌석으로 가득 찰지 모른다. 모쪼록 지금의 반짝 회복세가 또 다른 ‘가뭄’을 막는 단초가 되길 바란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