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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경 연재소설 ‘위선의 시대’ [125]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박선경 필진페이지 + 입력 2025-06-16 06:30:04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무엇이 인간답게 하는가. 타인의 지배로부터 떨어져 나온 세계였다. 인간을 규정하는 어떤 허위의식도 없이, 존재로 권리가 유지되는 세상이었다. 돈이 없다고 업신여김 받고 덜 배웠다고 무시당하고 직급이 낮다고 차별받는 세상은 사람 사는 곳이 못 됐다. 기계에 손이 달려 들어가고, 재봉틀 바늘에 손가락이 끼고 뜨거운 다리미에 얼굴을 데어도 노동자의 삶은 변하지 않았다. 죽어라 일해도 가난은 제자리걸음이었다.
 
태어나면서 귀에 익숙한 부모의 탄식을, 동생들의 절규를 끊고 싶었다. 태주는 찰라, 승연의 체취가 기억났다. 승연의 젖가슴에서 나는 체취는 어머니의 그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비릿한 살냄새였다. 첫날밤 기억은 더욱 뚜렷했다. 승연의 목덜미와 가슴, 배꼽, 사타구니에선 태주가 이른 새벽 배달했던 맑고 고소한 우유 향이 났다. 태주는 누이들이나 여공들에게서 맡아 보지 못한 냄새가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여자 냄새였다.
 
태주는 사흘 전 승연의 몸에서 나던 다른 냄새도 기억했다. 살이 타들어 가는 냄새였다. 전태일의 몸이기도 했고 승연 아버지 오정일의 몸이기도 했다, 고통은 느낌이 아니라 냄새였다. 기억은, 거기서 멈췄다. 다만 태주가 승연한테 하고 싶었던, 아껴 두었던 말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승연아, 사랑해.”
 
그럴 리 없다. 곧 해결될 거라고 했고 연락한다고 했다. 승연은 웃음이 나왔다. 사람이 어떻게 이토록 잔인한 농담을 진지한 목소리로 전달한단 말인가. 암이 아닌 환자에게 몇 달 안 남았다고 오진하는 돌팔이 의사와 같은 거겠지. 아니, 오진한 의사보다 더 나빴다. 착각이거나 실수였다. 끈질긴 게 사람 목숨이다. 어차피 가는 인생이라지만 어차피가는 시간이 누군가에게만 그렇게 짧아선 안 됐다. 착각과 실수로 사람 목숨을 흔한 농담처럼 헤아려선 안 됐다.
 
태주의 몸에 피가 돌지 않고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걸 확인할 때까지 승연은 감정의 동요조차 없었다. 배터리는 충전하면 돼. 잠시 방전된 거야. 승연은 자신의 온기로 그를 감싸면 그가 눈을 뜰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피가 돌고, 온기가 돌 거라고 믿었다. 그래야 했다. 그는 아직 승연에게 사랑한단 말을 하지 않았다. 나 사랑해? 승연이 물으면 태주는, 말을 해야 아니? 대답 대신 승연의 이마에, 볼에, 입술에 입을 맞췄다. 말을 해야 알지. 그 말 꺼내는 게 그리 힘들어? 승연이 삐죽거리면 태주는 귀엽다는 듯이 승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말하는 게 뭐가 어렵겠어. 아끼는 중이야, 아끼고 아끼다가 더 이상 내 가슴에 담아 둘 수 없을 만큼 벅찰 때 하려고.”
 
승연은 태주가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그가 승연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승연과 입맞춤을 하거나 밤을 보낼 때, 태주는 승연을 깊이 안았다. 단순히 살과 살이 맞닿은 느낌이 아니라, 영혼과 영혼이 교차하는 느낌이었다. 말을 하지 않는다고 사랑이 아닌 게 아니었다. 그래도 벅찰 때 하기로 해 놓고.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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