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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여왕 5월이 달아나기 전에 좋은 날을 잡아 어딘가 다녀오고 싶었다. 네이버 지도를 열고 전철이 닿는 경기도 지역을 훑어봤다. ‘BMW족’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양평 5일장이 풍성하니 볼 만하다는 정보를 얻었다. 경의중앙선으로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라서 날짜를 살폈다. 5일장을 보려면 3·8이 포함된 날을 골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한 날이 지난달 28일 수요일이었다.
옥수역에서 경의중앙선으로 환승해 먼저 원덕역을 목적지로 잡았다. 10시에 출발하다 보니 도착 무렵이 점심시간이었기 때문에 식당부터 정해야 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식후경’을 하게 됐다. 양평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해장국이다. 양평해장국은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사용된다. 그만큼 옛날부터 해장국 성지인 곳이다.
양평은 조선시대부터 주요 한우 사육지
양평이 해장국으로 유명하게 된 배경에는 품질 좋은 한우가 있다. 양평은 오래전부터 ‘양평개군한우’라는 한우 브랜드를 키우기 시작했다. 한우 브랜드화는 1980년대부터 읍·면 단위, 영농조합법인, 시·군 한우회 등 민간 단위에서 시작됐다. 초창기 대표적인 브랜드로는 안동황우촌·남해화전한우·울산한우회·강진맥우 등과 함께 양평개군한우도 이름을 올렸다.
양평개군한우라는 브랜드에서 알 수 있듯이 양평 중에서도 개군면의 한우가 가장 대표적이었다. 양평 상수원보호구역이라 축사 면적이 작고 사육 머릿수가 많지 않았다. 이런 불리한 조건을 딛고 생후 4~5개월 된 수소를 거세해 육질 등급을 획기적으로 높인 한우를 개발했다. 이를 활발한 홍보마케팅을 통해 예부터 일군 한우 마을의 명성을 이어 왔다.
양평은 조선시대부터 경기도에서 소 사육 머릿수가 가장 많았다. 우시장이 활발하게 형성되고 도축장이 발달했다. 자연스레 도축장에서 소 부산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를 선지와 함께 끓인 해장국의 탄생은 필연이었다. 해장국은 시골 장터에서 값싸게 배를 두둑이 불리는 최고 인기 메뉴가 됐다. 기차와 자가용 등 교통수단의 발달로 수도권으로 소문이 나면서 유명세를 타고 양평은 전국구 해장국 맛집이 됐다.
한우 유명한 개군에 있는 양평해장국 원조
양평에는 오래된 해장국 식당이 많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개군면 신내길에 있는 ‘양평신내서울해장국’이다. 상호에 뜬금없이 서울이 들어가 있는 점이 이채롭다. 사연인즉슨 ‘양평해장국’처럼 특정 지역명이 들어간 상호는 상표등록이 안 되기 때문에 고육지책으로 지은 이름이란다. 1982년 문을 연 이곳은 많은 사람들에게 원조로 인정받고 있다.
필자는 이곳을 25년 전쯤에 왔던 기억이 있다. 기자 초년 시절이었는데 동기와 함께 차를 몰아 취재차 왔던 곳이다. 흐릿한 기억 속 식당은 빛바랜 각종 감사장과 표창장들이 카운터 주변에 요란하게 걸려 있었다. 이번에 찾은 식당 내부엔 깔끔하게 메뉴판 정도만 붙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리모델링을 하느라 오빈역이 있는 오빈리로 본점이 잠시 이전했었고 그곳 역시 현재 본점이란 이름을 달고 영업을 하고 있다. ‘양평신내서울해장국 본점’이란 상호를 쓰면서 영업하는 곳이 양평에만 두 곳이 있다는 것이다.
개군면 본점은 원덕역에서 30분 정도 걸어야 한다. 연계되는 마을버스도 있지만 배차시간이 길어 연계가 힘들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냥 도보 이동하기로 했다. 시골길 정취를 느끼면서 살살 걷는 것도 재미다. 한참을 걸어 식당이 있는 마을에 접어드니 마을 입구에 거대한 ‘공세1리’ 표지석이 식객을 반긴다. 표지석 너머 빨간 식당 간판이 단박에 눈에 들어온다. 해장국에 들어가는 고추기름을 연상시키는 빨간색 간판이 식욕을 자극한다.
해장국을 주문했다. 양과 선지가 들어간 대표 메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근데 사실은 처녑도 만만치 않게 들었다. 어쩌면 처녑이 더 많아 보이는 비주얼이다. 길게 손질한 내장을 뚝배기를 가득 덮을 정도로 풍성하게 넣어 준다. 약간의 고추기름이 동동 떠 있는 육수를 들추자 커다란 선지 두 덩이가 나타난다. 한눈에 봐도 신선해 보인다.
양이 어찌나 많던지 한 그릇을 다 비우지 못했다. 25년 전에는 소주도 몇 병 비웠을 것이고 뚝배기 바닥을 뚫을 기세로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을 것이다. 맛은 기억인지라 그날의 추억이 저절로 소환된다. 맛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 잠깐 동기가 생각났다. 동행했던 묘령의 한 여인도.
지평이란 지명 널리 알린 일등 공신
식사를 마치고 다시 시골길을 따라 유유자적 원덕역으로 왔다. 경의중앙선을 타고 지평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다. 지평역행 전철이 자주 있는 것이 아니어서 시간을 잘 맞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30분 이상 기다리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원덕역 다음 역인 용문역을 지나면 바로 경의중앙선의 종점 지평역이다. 이곳에 온 이유는 지평막걸리를 만드는 지평양조장을 보기 위해서다. 현대식으로 새로 지은 공장이 아닌 딱 100년 전 지은 양조장을 개·보수해서 박물관처럼 만들었다.
지평막걸리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문을 열었다. 건축 양식은 조선 전통 목구조 위에 일식 목구조를 접합한 절충식이다. 흙벽돌로 외벽을 쌓았으며 환기를 위해 건물 상단에 높은 창을 냈고 벽체와 천장에 왕겨를 채워 넣어 보온성을 높였다. 서까래 위에 나무 산자 대신 대자리를 짜 넣은 점도 특징이다.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국가등록문화유산 제594호로 지정됐다. 지평양조장 바로 앞에 학교가 있어서 민원이 많이 발생해 춘천에도 공장을 지어 가동 중이다. 양조장 인근에 지평막걸리 직판장이 있다.
살거리·먹거리 풍성한 3·8일 5일장
이번엔 지평에서 양평으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양평읍은 원덕·지평과 같은 마을과 체급이 달랐다. 도시는 활력이 넘쳤고 특히 5일장이 서는 날이라 더욱 활기찼다. 비가 살짝 뿌리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이라 파장 분위기도 겹쳐 상인들이 주섬주섬 장을 마감하고 있었다. 온전한 5일장 분위기를 볼 순 없었지만 정겨움은 느낄 수 있었다.
장터에는 어김없이 먹거리 존이 있다. 특색 있었던 것은 먹거리 존 탁자 위에 올라와 있는 막걸리는 죄다 지평막걸리라는 점이었다. 특유의 우윳빛 지평막걸리 통이 모든 테이블을 지배한다. 서울막걸리의 초록색은 보이지 않는다. 시장에 왔으니 뭐라도 들고 가야 하지 않겠냐는 마음에 옥수수·버섯 등을 샀다. 더 사고 싶었지만 BMW족에겐 짐이 늘면 고역이다.
물 맑은 양평시장의 보석 같은 식당
서울로 가기 전 양평에서 저녁 식사를 해결하려고 시장을 어슬렁거리다 만난 ‘우리집양평우동’. 상호가 마음에 들었다. 들어서니 1인 운영 식당이다. 식대는 선불, 모든 것을 셀프로 해야 한다. 요즘은 익숙한 식당의 일상이다.
“우리집양평우동은 모든 제품에 대해 최고의 맛과 건강을 위해 항상 좋은 재료를 가지고 면과 육수, 양념 등을 직접 정성을 다해 만듭니다”고 소개하고 있다. 직접 맛을 보면 소개 글이 사실임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진정성 있는 곳이다. 일본 영화 ‘카모메식당’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우동면의 반죽은 4시간 숙성하고, 8가지 천연재료를 넣어 8시간 이상 끓여서 만든다. 다른 우동보다 국물이 시원하고 담백한 맛, 쫄깃한 식감을 선사하는 즉석 수제 우동이다. 김밥 역시 주문하면 말아 준다. 식당 안 시간은 느릿하게 흐르지만, 비 갠 하늘 서쪽 하늘 해는 어느새 많이 누웠다. 왔던 길을 되돌아갈 시간이다. 양평 5일장을 끼고 하루나들이 하기 적당한 코스를 체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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