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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연은 그 날짜를 오래 기억했다. 아니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망각의 강에 빠뜨리고 싶은 그날을 승연은 가슴에 묻고 있었다. 찾아가지 않은 코인 박스의 허름한 서약처럼. 그날 승연은 태주에게 직접 만든 손수건 일곱 장을 선물했다. 흰색 면실크 바탕에 네 귀퉁이에 태주 이름을 수놓은 것이었다. 반으로 접고 또 반을 접었을 때 어느 면이든 태주 이름이 보였다. 뭐지? 하는 표정의 태주에게 승연은 말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흰 손수건을 만들어 다려 드렸어요. 손수건은 시중에서 파는 것이 아니었어요. 무명천을 사다 만드셨죠. 어머니는 무명천을 삶아 빤 후 적당히 말린 다음 보자기에 싸서 발로 밟았어요. 그런 다음 다듬잇돌 위에 놓고 두드려 부드럽게 만들어요. 자로 재서 네모나게 가위로 자르면 반듯한 사각형 손수건이 여러 장 만들어져요. 가장자리는 실이 풀리지 않게 일일이 시침질로 마감하죠. 어머니의 정성이 들어간 손수건으로 아버지는 손도 닦고 입도 훔치고 하셨어요. 어머니의 손수건은 아버지의 품격이자 파이팅이었어요. 태주 씨 손수건이 없는 것 같길래 어머니가 만든 방법으로 저도 만들어 봤어요. 손빨래하면 되고요, 일부러 일곱 장 만들었어요. 면실크라 다림질하면 더 고급스럽긴 한데 다릴 시간이나 있으려나.”
승연의 긴 사설을 들으며 태주는 손수건을 손에 쥐고 오래 바라보았다. 풀을 먹였는지 해사생도 복장처럼 깔끔하고 정갈했다.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고향을 떠나올 때 언덕에 홀로 서서 눈물로 흔들어 주던 하얀 손수건. 왜 그때 태주에게 트윈폴리오의 하얀 손수건이 떠올랐는지 승연은 몰랐다. 태주도 말하지 않았다. 그냥, 쓸쓸했다.
섹스에도 주제가 있다면, 그날 승연이 태주와 나눈 섹스의 주제는 도피였다. 승연의 섹스는 급했다. 아버지의 환영으로부터, 그리고 스스로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었다. 승연은 태주의 옷을 벗기고 목과 젖꼭지를 애무했고 서슴지 않고 배꼽 아래로 내려가기도 했다. 태주는 그런 승연이 아프고 슬펐다. 낯설고 이상한 열정이었다. 과다하게 포장된, 위조된 열기였다. 승연의 뜨거워진 몸에서는 냉기가 느껴졌다. 전혀 배고프지 않은 짐승이 굶주린 양, 달려드는 모습이었다. 달아나고 싶기는 태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시간이 빨리 흘러서 눈을 뜨고 나면 한 일주일쯤 지나가 있기를 바랐다. 승연과 보조를 맞춰 주고 있었지만, 태주의 몸과 생각은 따로 놀았다. 잡념이 들끓었다. 뜬금없는 생각들이 두서없이 치고 들어왔다. 사유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 사유도 노동일까. 겟세마네에서 배고프지 않은 만찬을 제자들과 나누며 예수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승연의 거친 숨소리가 태주의 귓가를 어지럽혔고 머릿속은 더 아수라장이 되고 있었다.
좋았던 기억도 떠올랐다. 태주는 습관처럼 항상 책 한 권씩을 끼고 다녔다. 어느 날인가 승연은 태주에게서 책을 뺏으며 말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오늘은 그딴 건 그만 인식하고 나만 열심히 인식해요.”
[글 박선경 일러스트 임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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